Sunday, August 21, 2016

가성비

1.
일요일 저녁, 갑자기 실시간 검색어에 생과일 주스가 나온다. 또 쥬시나 뭐 이런 게 먹거리 엑스파일에 걸렸나 해서 방송을 찾아봤다.

문제 요지는 이거다.

1) 비위생적이다(버린 걸 재활용, 해동 관리가 제대로 안됌)
2) MSG를 넣는다 (역시 MSG=마싰고)
3) 시럽을 넣는다

1)이야 당연히 식품 관리의 문제니 관리하고 지적하는게 맞는데, 2)랑 3)은 잘 모르겠다.

3천원 가량의 돈을 내고 거기서 향이 좋은 고품격의 생과일의 맛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를 채울 가공의 뭔가가 필요하다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 즉석 생과일 주스를 잘 안먹어서 모르겠는데, 원래 과일주스를 제대로 만들려면 더 많은 양의 과일이 필요하고, 더 비싸다.
(바르셀로나 보케리아 마켓에서도 오렌지 한 무더기에 2유로지만 종이컵만한 주스 한 잔에는 3유로다.)

물론 2)와 3)의 사실을 속인 회사는 잘못했지만, 제대로 돈을 주고 소비하는 문화가 있었더라먼 저런 '사기극'은 발생하지 않았을거다.


2.
사실 얘기하려고 한 건 주스가 아니라..가성비다.

나는 가성비라는 말이 너무 싫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겠다는데는 뭐라고 안 하겠지만 내가 쓰고 먹는데 "어머 저거 저렇게 하면 더 싼데" "가성비로는 이게 최고라니까" 하면서 내 소비가 마치 흥청망청인거 마냥 말하는 게 너무 싫다. 가격을 용량으로 나누는 걸 몰라서 안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게 별로라 안하는거다.

나는 그냥 돈 더 내고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는 게 좋다. 엄청나게 돈을 잘 버는 것도 아니지만 그냥 쭉 그랬다.

"그거 모으면 1년이면 얼마고 5년이면 얼마고.."

네네네, 잘 알겠습니다만.
나는 그렇게 지금 내 현재 행복을 팔아서 부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가성비가 좋은 것과 정말 좋은 것이 같지 않기 때문에 난 좀 더 내가 좋은 걸 좇고 싶다.

물인지 보리차인지 알 수 없는 액체를 마시는 대신 제대로 크레마가 올라온 커피를 마시고 싶고, 할인 특가를 누리기 위해 줄을 서기보단 그냥 제 돈주고 편하게 먹는 게 좋다.

사회 전체가 자꾸 가성비만 따지다 보니까 다같이 낮은 수준의 소비로 평준화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며칠전에 트위터에서 본 말처럼 정말 "압도적인" 수준의 경험을 해서 한 번 기준을 제대로 잡아줄 필요가 있다. 그게 화장품이건 음식이건 술이건 간에. 그래야 좋고 나쁨의 기준이 생기고 사람의 '취향'이라는 게 생긴다.

백종원이 별로 싫진 않지만 백종원 식의 프랜차이즈에는 엄청나게 거부반응이 드는 것도 '우리는 가성비', '원가절감' '거품 뺀'다는 식으로 해서 고급 수준의 음식을 '거품'으로 매도해서다. 빽다방 커피가 싸고 그게 그거다라고 하지만 제대로 커피를 크레마 내서 하는거랑 그냥 큰 잔에다가 물붓고 언제 로스팅했을지 모를(그리고 원산지도 모를) 샷을 섞어주는 거랑은 맛이 다르다. 라떼도 순수한 우유와 샷의 맛이 아니라 정체모를 식물성 휩을 잔뜩 올려놓고 "우리는 양이 더 많아" "니네는 속아왔어"라고 하면 할 말이 없다. 이렇게 취향은 다시 퇴화된다.

원료가 같다고 하더라도, 방법이 다르면 결과가 다른데 이 과정 자체를 무시하는 게 싫다. 백종원이 그랬다는 게 아니라 백종원을 대표로 하는 그 '가성비' 족들은 대체로 "저렴이"가 "고렴이"와 별반 차이가 없다면서 모든 '전문가'들의 노력을 다 거품으로 만들어버린다.

여기에 대해 존경하는 홍여사님은 몇 년전에 비싼 화장품에 대해서 "똑같은 콩으로 만들더라도 어떻게 만들면 된장이고 어떻게 만들면 두분데... 원료 같다고 결과가 같냐"며 '비싼 건 어느 정도의 이유는 있다'고 해주셨다.

내가 좋아하는 화장품 얘기를 해보면 그것도 다르다. 텍스쳐의 차이가 효과를 좌우한다. 색조도 마찬가지. 그런데 단순히 "들어가는 원료 같고 공장 같음"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결과를 예견하는 건 앞에서 된장과 두부를 같다고 보는 거랑 마찬가진거다. 거기서 배합과 텍스처 만드는 것, 발효, 이런 등등의 과정들이 모여서 차이를 만든다.

공연도 마찬가지고 모든 게 마찬가지다. 가격이 높아지는 건 중간 마진 장난도 있겠지만, 대부분 그만큼 인풋이 있어서다. 맨유 티켓 가격이 하늘을 찔러도 사람들은 돈을 더 내고라도 최고의 경기를 보고 싶지, 싸다고 저기 저 볼튼이나 아니면 뭐 블랙풀 이런 걸 보려고 하지 않는거랑 마찬가지다.

취향에 투자하는 걸 경제적 효용성으로 따지다보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3.
앞에 나온 것들은 내 생각이니까 남한테 강요하진 않는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해서 돈을 모아서 행복하다면 그건 그 사람의 일이고, 나는 덜 모으더라도 이렇게 살고 싶고 나한테는 이게 더 맞는 방법인 것 같다.

예전에 기타노 다케시 책에서 그 어머니가 "세일할 때는 줄서지 말것"이라고 가르쳤다는데 나는 동의했다. '가성비'가 좋은 상황이 왔을 때 소비를 하게 하는 사회에 맞춰 살지 말고 자신의 필요에 의해 살라는 걸 가르친거다.


4.
그럼으로 나는 내일 내 취향을 기르기 위해 전문가가 정성껏 내려준 커피를 마셔야겠다.
7천원에 두어 시간의 행복을 살 수 있다면 기꺼이 쓰겠다. 나는 커피를 마시고 각성해서 새나라의 일꾼이 돼어 다시 일할테니까. 포드의 생산라인 못잖은 커피-일 라인은 이제 21세기의 새로운 컨베이어벨트가 돼서 사람들을 자동적으로 일하게 만든다. 일하자. 일요일이니까 일을 하고 월요일엔 또 일을 해야지.

라떼 맛있는 집이 집앞에 딱 생겼으면 좋겠다. 양은 적더라도 재료 안 아끼고 잘 내리는.



Friday, August 19, 2016

범죄의 여왕(The Queen of Crime, 2016)

1.
회사에 처음 들어갔을 때가 2013년 11월이다. BIFF는 10월이라 다른 담당자가 마켓 자료를 보라고 전달해준 걸 봤는데 "족구왕"에 별 다섯.

그리고 족구왕은 1년뒤에 개봉됐는데, 그때 즈음 다시 보고 나서 아.. 이런 영화가 한국에 있다니 하면서 박수를 쳤다. 너무 좋아서 영어로도 리뷰쓰고 이리저리 공유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 블로그에 그 해의 한국영화 으뜸이로 족구왕을 썼던 것 같기도 하다.

잉투기는 안되고 족구왕은 된 이유는 간단하다. 재밌다. 똑같은 심각한 이야기를 해도 재밌으면 본다. '상업영화'의 성공 1순위는 재미다.

2.
왜 범죄의 여왕 얘기를 하면서 족구왕 얘기를 꺼냈냐면 범죄의 여왕은 족구왕 제작사(광화문시네마)에서 만들었다. 작년인가 올 초였나 마켓에서 광화문시네마 신작이 나온다는 얘기 듣고 꽤 기다렸던 영화다.


영화가 족구왕처럼 밝거나 경쾌하진 않지만 그림이 좀 비슷하다. 만약 족구왕의 만섭이 세상의 풍파를 거치고 때묻은 상태가 돼, 결국 이 고시촌에 들어온다면 덕구같이 되지 않았을까?

복학이라는 1차 위기를 거쳐 졸업해보니 세상은 이미 3포, 5포, 헬조선, 이생망에 문송한 곳이 돼버렸다. 갈 곳은 이제 '개천에서 용날 수 있다는' 고시촌밖에 없다. 여기에는 경찰 공무원, 사시 같은 우리 사회의 '용'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고시촌이 희망의 공간이 아니라 도피의 공간, 생존의 공간인 사회 밑바닥 사람들도 같이 엮여 있다. 개태는 길거리 태생이다. 그냥 그 공간에서 태어나고 자라 여기가 고향인 사람이다. 뉴스에서도 고시촌 얘기가 나오면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린 사람과 여기가 생존의 공간인 사람들이 나오는데 영화에서 그 공간은 잘 분리돼있다. 빼곡한 포스트잇과 할 수 있다는 겪언이 이곳을 탈출하려는 '개천' 속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배달음식과 컴컴하고 퀴퀴한 방안의 모습은 여기가 그냥 삶이 돼버린 사람들도 있다는 걸 알려준다.

3.
영화 속 고시촌을 보면서 청킹 맨션이 떠올랐다. 기본적으로 어두운 배경에 녹색빛이 감도는 제한된 공간에서 주인공들은 뛰어다닌다. 미경은 임청하를 떠올리게 하는 무릎 기장의 화려한 원피스를 입고 이 공간을 휘젓고 다닌다. 막 오 똑같아 이런 건 아닌데 갖힌 공간, 그리고 폐쇄적이고 희망없는 이미지가 청킹맨션을 닮은 것 같았다. (물론 홍콩 다녀온지 얼마 안돼서 모든 잔상이 홍콩이랑 겹쳐보일 수도 있다.)





4.
영화는 120만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수도요금이 나온 걸 이상하게 여긴 고시생 엄마가 고시촌에 와서 범죄를 밝혀낸다는 스토리다. 꽤 엮어놓으려고 했지만 사실 절반 지나면 범인은 누구겠구나 하고 답은 나온다.

그래도 끝까지 보고 싶은 건 왜 이 사람이 이렇게까지 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그걸 만든 사회의 모습이 구석구석 잘 녹아있어서다.

5.
영화에서 사회 문제를 얘기할 때 이런 식으로 말하는 영화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너무 단편적으로 '헬조선' 하고 외치는 것보다, 영화니까 우선 재밌게 즐기돼 아 이런 얘기아 이거였구나 하고 해석해갈만한 여지를 남기는 게 보는 사람도 흥미를 느끼지 않을까.

출장 전에 밤새서 보고 너무 재밌어서 몇 번 더 봤는데, 완벽하게 매끄럽지는 않다. (19세인데도 불구하고 결론이 너무 빤하다....) 그래도 이런 영화가 많이 나와서 '울어라' '슬퍼라' 하고 강요하는 영화들 사이에 뭔가 다른 움직임을 줬으면 좋겠다.


Tuesday, August 16, 2016

위대한 개츠비 (The Great Gatsby, 2013)

1.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계산을 하게 된다. 내가 조금만 더 어렸다면 이렇게 재지 않았을텐데, 내가 몇년전만 됐어도 그냥 했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조금 더 움츠러들고 소극적으로 변하게 된다.

개츠비가 위대하다는 건 속물로 가득한 미친 세상에서 개츠비는 혼자만 다른 길을 걷고 있어서다.


2.
며칠전에 기내 영화에서 바즈 루어만의 개츠비가 있길래 공짜로 주는 화이트 와인 세 잔이랑 함께 영화를 봤다. 그리고 한국에 오자마자 또 다시 찾아 봤다.

이해갈 것 같지 않았던 데이지가 조금씩 더 이해가 됐고 개츠비의 안쓰러움보다는 데이지의 선택에 동감했다. 나이가 들면 이렇게 되는건가.

개츠비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라고"하는데 마음이 어쨌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설이는 데이지의 표정이 이해가 갔다. 다 내려놓기에 이미 쥐어버린 게 너무 많아서 계산을 해야 한다. 그냥 던져버리기엔 위험이 너무 크다. 데이지를 욕하기에 이미 둘이 떨어진 시간은 너무 길어져버렸다. 그동안 개츠비는 "내가 성공해서 호강시켜줄게"라는 생각으로 불태우고 있었지만, 데이지는 이미 다른 삶에 적응해있었다. 사랑보다 사람이 옆을 채워준다는 게 생각보다 크다.

3년전 처음 영화를 보고 책을 읽었을 때랑은 다른 느낌이라 놀랐다.


3.
바즈 루어만 버전 개츠비는 맨체스터에서 처음 봤다. 한창 너무 힘들어서 다 때려치고 집에 가자, 이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였다. 내 생일 한 1주 전이었나? 존이 맨체스터에 와서 밥먹재서 밥도 먹고 영화를 봤다.

영화가 막 슬픈 것도 아닌데 펑펑 울었다. 그리고 에라 망한 인생 어디 1년 더 논다고 더 망할까 하고 파리행 티켓을 끊었다.

생일이 칸느 기간이라 파리에도 칸느 영화제 포스터가 가득 붙어있었고, 개츠비도 그 구석에 있었다. 파리에서는 프랑스어 더빙판으로 또 한 번 봤다. 영화에서 캐리 멀리건 머리가 너무 예뻐서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서 70유로였나? 주고 저 머리 했다가 또 울면서 맨체스터에 돌아왔던 기억도 난다. 동양인의 모질과 서양인의 모질은 다르다. 매우 많이 아주.


이 영화를 보고 희망을 얻었다고 하면 어색하겠지만, 그냥 나는 그때 개츠비처럼 되고 싶었다.

"왜 여기 와서 이 고생해요?" "빨리 돌아와" "너 돌아오면 나이 몇인줄 알아?" "한국에서 잘 안됐어요?" 이런 말들에 질려있을 때 개츠비처럼 그냥 한 번 끝이 보이더라도 밀고나갈 위안을 얻었다. 영국에 온 건 도망이 아니라 도전이었다는 걸 증명해보고 싶었다. 바즈 루어만 영화의 화려한 불빛을 바라보며 나도 어떤 방법이 됐든 내 방식대로 한 번만 더 해보고 가자, 그렇게 영화 한 편으로 1년 반을 더 버티다 왔다.



4.
영화가 책보다 좋은 이유는 사운드트랙 때문도 있다.



"나는 어리지도 예쁘지도 않지만 넌 나를 사랑할 거야"하는 데이지 시점 가사를 듣다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

마음이 다 이렇게 간사한 거 아닌가.. 사실 내가 바람 펴도 너는 절대 피지마, 나는 너를 잊어도 넌 나를 잊지마 이 가사도 처음 듣고 감탄했다. 세상은 내 중심이고 모두가 나를 좋아해줬으면 좋겠고 나는 변해도 너는 안 그랬으면 좋겠어, 이게 당연한 마음이니까.


5.
데이지의 마음이 이해가는 이 시점에, 나는 다시 또 개츠비처럼 무모한 도전을 할 것 같다. 사서 고생, 팔자 트위스트가 dna에 박혀있는건지 모르겠으나.  개츠비처럼 다 잃게 되더라도 혼자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Monday, August 15, 2016

무방비상태

1.
출장을 다녀왔다. 성수기라 그런지 출국은 30분, 귀국은 40분 지연이 됐고 짐이 나오는 것도 평소의 곱절 이상 걸렸다. 홍콩을 경유해 가는 방콕행 비행기라 그런지 태국 관광객도 많았다.

사와디카- 하는 인사를 듣자마자 내 표정이 풀린다.
영어로 말을 할때면 이상하게 표정이 밝아지고 목소리는 한 톤 올라간다. 이건 홍콩에서부터 시작된 내 생존전략이다. 완벽하지 못한 영어라면 표정이라도 밝게, 무표정한 무서운 '아시안'만 아니면 되지 않나 이런 마음으로 홍콩 첫학기에는 정말 입에 펜 물고 입꼬리 올리는 연습도 했다.

학생증 사진부터 다르다. 홍콩에 도착하자마 찍은 거주증 사진의 입모양이 八자로 축 쳐졌는데 끝날 때쯤에는 v 이렇게 변해있다. 역시 인간의 의지는 대단하다.

홍콩에 내려서 익숙한 캔토를 들으니 내 표정은 더 밝아진다. 비가 올 거라던 날씨도 화창했고, 온도는 한국보다 더 낮았다. 역시 홍콩은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2.
출장 일정은 엄청 간단했다. 원래 거래처도 만나고 그랬어야 했는데 일정이 엉키고 어차피 곧 마켓도 있으니까 굳이 그럴 필요를 못느껴서 정말 회사 모임만 하는 걸로 바뀌었다. 3월에도 홍콩에서 만나서 그런지, 그냥 이젠 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이거 해줘", "응 이건 뭔데?" 이렇게 몇 개 업무 체크나 하고 요즘 나오는 영화도 체크해보고 그러고 끝이다.

이 회사에 있은 지는 3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막내라 뭘 해도 우쭈쭈에 레스토랑에 가서 하나 남으면 다 내 접시 앞으로 온다. 왜냐면 난 아직 어리니까 더 먹어야 하니까...^^ 덕분에 원없이 먹고 그날 펜슬 스커트를 입은 나를 저주했다.


3.
홍콩에 오면 다른 나라에 갈 때보다 마음이 편하다. 외국인이지만 아예 낯설지 않은 곳, 그리고 아시안이라고 해서 차별받지도 않는 외국이라 새벽에도 잘 나다닌다. 밤거리를 걸어도 칭챙총을 들을 일도 없고 괜한 불링을 당할 일도 없다.

그리고 여기서는 모든 걸 내려놓고 친구들한테 기댄다. 마치 정대만이 수비해줄 강백호를 믿고 계속해서 안들어가는 3점슛을 내던진 것처럼, 그냥 '애들이 있으니까' 이 마음으로 편하게 다닌다. 고맙게도 친구들은 이런 나를 여전히 5년이 지나도록 잘 챙겨준다.

첫날 존은 아이스크림 퍼프를 들고 역 앞에서 기다렸다. 만나자마자 폰 옥토퍼스 지갑을 챙기라며 잔소리가 나온다. 어딜 가서도 이렇게 챙김받는 존재가 아닌데 여기만 오면 애들은 나를 마치 자기 동생 챙기듯 챙긴다.

음식점에 가서도, 사실 이제 어느 정도 짬이 차서 대충 읽으면 뭔지 알 수는 있지만 여전히 선택을 미룬다. 이 무슨 초딩 응석인가 하지만 그냥 여기서는 다 받아주는 친구들이 있으니까 맘놓고 더 그러는 걸지도 모른다.

PMQ는 생각보다 그냥 그랬다. 요즘 오래된 건물 바꿔서 예술단지로 바꾸는 건 신기한 일도 아니고, '로컬'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하지만 정작 가격은 로컬이 아니다. 진짜 로컬을 경험하고 싶다면 웡타이신이나 셕킵메이, 아니면 뉴테리토리 이런 데를 가봐야 한다는데 다 동의했다. 그래도 날씨도 좋고 뭐...외국나오면 다 익스큐즈 할 수 있다. 나는 관대하다.

3월 마켓 이후 몇 달만에 만나서 sofohama라는 오가닉 퓨전 레스토랑을 갔는데, 평소 먹던 음식 가격의 두 배다. 학교다닐 때는 쳐다보지 않았을 테지만, 3년차 직장인이라 그런지 둘 다 그냥 좋다고 먹었다. 맛있는 건 잘 모르겠는데 G.O.D랑 콜라보해서 디자인해서 그런지 뭔가 인스타 사진 남기기엔 좋다.

존은 사람을 편하게 해준다. 존 앞에서는 그냥 영어를 잘해야겠다는 생각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뭘 해야한다는 그런 것도 없고, 그냥 다 물 흐르듯 술술 잘 흘러간다.


4.
둘째날 미팅이 다 끝나고 공식 업무를 마치고서는 조이스를 만났다. 전 회사 동료이자 지금은 만나면 레이시즘 조크로 서로를 위안하는 사이다. 조이스는 우산혁명때 트위터에서 꽤 열심히 활동했고, 지금도 중국을 아주 많이 싫어한다.

점심에 딤섬을 엄청 먹어서 저녁은 가볍게 먹어야지 하고 갔는데 만나기로 한 데가 호텔이다. 사실 레스토랑 링크 대강 확인하고 이게 뭐지? 했는데 대강 쪼리에 반바지 입고갈 분위기는 아녔다. 7시쯤 가서 식사를 하면 창가에서 심포니 오브 라이츠도 볼 수 있어서 좋긴 한데 가격은 그렇게 좋지 않다. 둘 다 파운드로 월급받는 처지라 아... 하면서 울 뻔 했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이렇게 먹어야지" 하면서 시켰다.

여기서 먹은 챠슈랑 춘권이 지금까지 먹은 것중에 아마 탑3안에 들 듯. 마지막에 나온 누들은 좀 오일리했고 스테이크는 양이 너무 많아서 (2/3정도만 돼도 될 것 같은데) 먹다가 조금 질리는 느낌도 들었는데, 초반 에피타이저가 정말 너무 맛있었다. 후식은 그냥 쏘쏘. 예전같으면 케이크에 환장하고 퍼먹었을텐데 이제 식욕을 내 몸이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도 먹으면서 계속 "아 행복해" 이 말을 수도없이 반복하며 회사를 퇴사 안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다 먹고 네드 켈리에도 오랜만에 갔는데, 갈때마다 아저씨들은 할아버지가 돼고 오는 손님들도 나이가 많아진다. 그리고 이런 재즈바가 이제 더 이상 신기하지 않아 그런지 사이다 한 잔 하고서 페리타고 LKF로 갔다.

원래 이렇게까지 놀 계획은 없었는데, 그냥 분위기에 취한 것도 있고 미친 듯이 놀던 그때처럼 아직 놀 수 있다는 것에 감탄하면서.. 네 시까지 술먹고 다음날 좀 후회했다. 그때는 정말 매일같이 이렇게 마셨다는건데. 징글징글하다.


5.
셋째날부터는 걷는 게 불편해졌다. 첫째날 밤에 펜슬스커트를 입어보고 힙업운동 안한 게 티가 나서 다음날부터 새벽에 짐에서 스쿼트를 다시 시작했는데. 나는 왜 이역만리 외국땅에서 하지도 않던 스쿼트를 시작한 건지. 게다가 치마입는다고 플랫이 좀 발에 안맞았는지 발에는 물집이 골고루 여덟 개 잡혔다.

그래도 여전히 날씨도 좋은데다 학교다닐때처럼 컨버스+쇼츠+티셔츠를 입으니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라 무작정 걸었다. 몽콕에서 나와서 프린스 에드워드 근처의 플라워 마켓에 갔다. 홍콩 사람들은 꽃을 좋아하기도 하고 (생화가 길하다고 생각해서 어딜 가든 꽃이 많다) 지금 한창 꽃이 싼 철이라 시장은 바글바글했다.

기분이 안좋거나 홍콩이 지긋지긋해질 때 여기 와서 거베라를 색깔별로 사갔다. 장미는 내가 사기엔 거한 느낌이라 항상 분홍 거베라 빨간 거베라를 번갈아가면서 사다가 방에 꽃았다. 그때는 왜 그렇게 홍콩이 싫었나 모르겠다.


6.
점심시간쯤 돼서 지옥같은 MK에서 윙이랑 합류, 무간지옥같은 쇼핑 투어를 시작했다. 몽콕- 조던- TST에서 1차, 그래서 윙은 스탠스미스를 사고 나는 한국인한테 인기 많은 홍콩의 '제니 베이커리' 네 통을 샀다. (집에 와서 무게 재보니 3킬로...난 이걸 들고 하루종일 걸은건가). 사람은 더 넘치고 여전히 담배 연기는 매캐하다. 어딜 가든 이제 한국 가요가 흘러나왔고 시끄럽고 복잡하다.

쇼핑을 마치고 TST 미라몰 옆쪽에 있는 딤섬집에 갔는데 알고보니 그 건물이 알렉스네꺼라고. (어마어마했구나.) 관광객이나 인스타를 노린 캐릭터 딤섬집이었는데 윙이나 나나 둘 다 한 번은 오겠지만 두 번 올 맛은 아니다(지나치게 달고 소가 적다)라는 평을 내렸다. 네이티브가 아니라 딤섬이 어떤 게 맛있는지 잘 몰랐는데, 그래도 몇 년째 먹다보니 맛없는 딤섬집은 좀 알겠더라.

2차 쇼핑은 ifc-CWB. 윙은 이곳저곳 휘저으며 왜 안사냐고 하는데 그 탭을 보면 다 'made in Korea'라 별 재미가 없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 샵 제품도 좀 있고, 프랑스나 영국꺼도 있었는데 지금은 죄-다 한국이다. 명동 2중대같은 느낌이라 그냥 밥이나 먹고 싶었는데 정말 2시부터 8시까지 온갖 곳 다 돌아다니느라 4족보행할 뻔.

윙이랑은 쇼핑에서 잘 맞다가도 안맞는 부분이 있다. 나는 쇼핑을 좋아하지만 2시간 이상은 안하고 그냥 몇 군데 보다가 고민 별로 안하고 사는 스타일이고 윙은 모든 걸 다 보고 사는 편이다. 그래서 내 체력이 방전될 즈음에 윙은 피크에 오르고, 나는 카페에 가자고 징징대고 윙은 거기에 맞추다가 한 번씩 터진다. 이게 처음에는 좀 힘들었는데 홍콩-맨체스터를 거치다보니 이제는 대강 서로가 힘들 즈음이면 "카페갈래?" 하거나 "하나 더 볼까?" 이런 식으로 상대에 맞춰준다.

저녁은 로컬 식당.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다. 나는 중국어 메뉴를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지만, 여전히 '모르는 척'했고 윙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sweet sour &pork'와 초이섬, 팍초이를 주문했다. 예전처럼 연예인 얘기 대신 결혼과 앞으로의 커리어에 대해 주제가 넘어갔지만, 그래도 너무 무겁거나 힘들진 않다. 이렇게 우리가 같이 나이들어가는구나 슬프다가 그 시간을 같이 채워가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7.
홍콩에서 이제 혼자 하라면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다음번에도 중국어를 모르는 척하면서 친구들한테 기댈 것 같다.

도시 곳곳이 (흑역사를 동반한) 감정의 지뢰밭이라 가끔 너무 하이퍼되지만, 그래도 이렇게 아무 걱정없이 떠나올 수 있는 또 다른 공간이 있다는 게 감사하기도 하고.

Wednesday, August 10, 2016

홍콩

1.
갑자기 출장 오더가 내려왔다. 보통 이 시즌에는 싱가폴 HQ에 모여서 클라이언트를 만나거나 아니면 회사에 가서 타운홀 미팅을 하는데 홍콩에 가라고 한다.

홍콩에 있는 사무실은 사실 우리 그룹 안에는 있지만 경쟁자였던 회사가 인수돼서 나보다 좀 먼저 들어온 사람들은 관계가 떨떠름하다. 이번에도 "꼭 가야돼?"하는 말도 나왔는데

"홍콩가서 다같이 미팅도 하고 딤섬도 먹어, 멋지지 않니?"

우리 매니저 좀 쿨하다.



2.
3월 홍콩에서는 날씨가 거지같아서 이번에는 여름이니 좀 괜찮겠지, 했는데 웬걸.. 나흘 내내 비 예보가 있다.

면세점에서 새 선글라스를 샀는데 또 비가 온댄다. 해가 날 기미도 안보인다.
(너무 억울해서 이탤릭에 볼드까지 쳤다.)


* 지난 번 출장때 영웅본색에 꽂혀서 이런 선글라스를 샀는데 결국 한국와서 운동갈때나 쓴다.

35도정도 되는 날씨에 습도가 95% 거기다가 물을 붓는다니 아득하다. 한국 날씨가 건조해서 몸 버석댄다고 짜증낸 벌을 받는 걸까. 오랜만에 학교 근처 공원에 앉아 맥주마시려던 계획은 다 텄다. 


3.
홍콩을 검색하니 홍콩에서 사와야 할 것, 홍콩에서 먹어야 할 것, 홍콩에서 해야할 것 뭐 이런 게 주르륵 나온다.

마약쿠키라는 제니쿠키도 몇 상자는 사와야 할 것 같고, 달리 치약으로 이를 닦으면 내 커피에 찌든 덧니도 환하게 빛날 것 같다. 타이청 베이커리에서 에그타르트를 먹으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기분도 맛볼 수 있을 지 모른다.

위에 언급된 건 네이버 블로그에서 나온 홍콩 관련 Must들을 압축해본 거다. 이거 말고도 정두, 예만방 뭐 이런 것들이 있다.

예만방이 장국영 단골집이라고 하지만, 내가 알기로 장국영이 거기 가본 건 두세 번? 워낙 슈퍼스타라 그냥 그걸 가지고 사골처럼 우려먹는다. 저기 나온 대로 가면 한국인이 가득한 홍콩의 정취를 흠뻑 맛볼 수 있다. 엄마아빠 오셨을 때 가이드북에 나온 음식점 몇 군데 갔다가 오히려 엄마아빠는 저녁에 라면을 찾으셨다. (점보랑 레인보우는 진짜 별로... 왜? 왜 왜?)

제니쿠키는 내가 지낼 때만 해도 그렇게까지 유명한 줄 몰랐는데 (2010년), 저번 출장때 위에 나온 그 쿨한 매니저도 "이거 사러 가야하니까 우린 여기서 헤어지자" 하고 쌩 갔다. 홈페이지 보니까 싱가폴, 일본, 한국, 중국에서 유명한 것 같은데 정작 내 홍콩 친구들은 잘 모르는 눈치다. 이건 마치 신촌가서 이삭을 줄서서 먹어야 한다는 내 대만 친구의 모습을 봤을 때 그런 표정으로 "그게 뭔데?"

그렇게 속고 속으면서도 "오 내가 지금 홍콩에 왔어" 라고 느끼면서 일상을 좀 벗어날 수 있으면 좋은거겠지. 만서도... 아 팜유 쿠키 한 상자에 2만원은 너무하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터디에는 사가야지. ㅎ 공부 안한 핑계를 "저 이거 사느라 줄섰다고요" 해야하니까.....)

4.
촌스럽지만 오늘은 중경삼림 한 번 돌려보고 자야겠다. 항상 홍콩에 다녀올 때면 좋은 일이 생겼다. 이번에도 그랬으면 좋겠다.




Sunday, August 7, 2016

좋은 노래

1.
음악을 막 찾아서 열심히 듣는 편은 아니다. 공연장 가는 건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고(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집에서 공연실황 제대로 켜놓고 맥주 한잔 하는 그 정도?) 음악 듣다가 폰 날치기당한 기억이 있어서 이어폰 자체를 안쓴 지가 3년이 넘었다.

한 몇년 쯤 지나서 "와씨 이런 밴드가"하고 보면 그 밴드는 해체했거나 아니면 음악을 그만하거나 아니면 완전 이상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2.
근데 늦게 안 만큼 그 집착은 세진다. 아 내가 이런 노래를 지금에서야 듣다니 하는 반성때문에 밀린 걸 보상이라도 하듯이 열심히 듣는다. 한 노래를 하루종일 한 두세달은 듣고 정말 이 노래를 다시 들으면 토할 정도로 인이 박히고 나서야 그 노래 듣는 걸 그친다.

마이언트메리 중에서 Night Blue에 꽂혔을 때가 있었다. (내가 이 노래를 알았을 때 이미 순드래곤은 토마스 쿡으로 더 많이 나왔고, 나의 *사랑* 한진영씨는 옐로 몬스터즈로 더 활발히 활동했다)

아이팟 클래식 160gb짜리를 들을 때 열심히 라디오 천국 팟캐스트를 들었던 탓도 있었는지 거기 나오는 게스트 음악은 몇 번 찾아듣고 그랬는데 그러다가 얻어걸린 Night Blue는 정말 미친듯이 들었다.

중국 여행갔을 때 하루종일 아무말도 안하고 지냈을 때 그 음악만 들었다. 정순용씨가 상해에 잠깐 갔다가 방송에 나와서 얘기하는데 나는 그때 상해였고, Night Blue를 들으면서 이 사람이 있던 공간에 내가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면서 듣고 또 들었다. 상도 받고 유명한 건 골든 글러브앨범이지만, 나는 4집 모놀로그랑 5집 night blue, 내맘같지 않던 그시절(정순용 보컬은 여기서 최고라고 생각함)가 제일 좋다.

그때 기억이 너무 강력했던건지 지금 내 이메일 주소도 myauntmary.ljh 로 돼있다. 내가 이 밴드의 공연을 찾아다닌 것도 아니고 이 밴드가 활발히 활동할 때 따라다녔던 것도 아니지만, 내 인생의 소중한 순간에 함께 한 밴드라 이메일 주소를 바꿀 수가 없다. 영어 이름이 marie라 이메일 주소 뜻이 뭐냐고 가끔 물어보는 사람도 있는데, 이 사연을 얘기하기에는 내가 너무 '덕후'같아보여서 차마 말할 수가 없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는 foster the people 의 i would do anything for you 에 꽂혀서 프라도랑 레이나 소피아를 오가면서 이 노래만 들었다. 지금도 이 노래를 들으면 스페인의 슴슴한 겨울(*실내랑 실외랑 그닥 차이 없는 살짝 낮은 온도)과 한없이 우울했던 그때 내가 떠오른다.

이런 노래가 몇 있다. 그냥 그 장소에서 인이 박힐 정도로 들어서 그 노래를 들으면 그 장소가 떠오르는 곡들. lana del ray young and beautiful은 2013년 파리에서 징그럽게 많이 들었다. 5sos의 amnesia는 시청이랑 광화문 부근에서 너무 들어서 앨범에서 아예 삭제해버렸다.


3.
정말 좋은 노래라면 사실 좀 아껴서 나눠 들어도 될텐데 하는 마음이 든다. 이렇게 금방 질려버리지 않도록.

요즘 꽂힌 노래는 run river north의 29.

29살이라는 것도 있고 오빠 백넘버가 29여서 그냥 29라는 숫자에는 애착이 가서 다른 곡보다 이 노래를 먼저 들었고, 지금 다른 곡으로 아직까지 못넘어가고 있다.

4.
음악을 듣다 보니까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어쩌다보니 여기까지 온걸까.

Friday, August 5, 2016

잘 돼야 할 영화

1.
인천상륙작전 스코어가 생각보다 괜찮다. 625 향수라고 하기엔 관객 스코어가 2030이 압도적이다. 날씨가 더워서 가성비 제일 높은 휴가로 영화관이 딱일 수도 있다. 이걸 놓고 뭐 할배들 동원했다느니 하는 소셜미디어 글 보면 좀 피곤하다.

그냥 돈 만원 주고 시간 떼우기에 제일 좋은 게 영화말고 어딨나.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그렇게 예술영화를 찾았다고 '개봉되서는 안될 영화'느니 뭐 이런 말 하는지.
사실 극장이라는 시장에서 처벌받아야할 건 유료시사회같은 꼼수 피우는 영화지, 영화에서 (도덕률의 법칙 아래에서) 무슨 내용을 만들건 그건 감독 마음이다.

나도 리암 니슨이 한국 영화 나온 게 신기해서 극장에서 다시 볼 예정. (물론 조조로.)

2.
영화를 보면서 싫어하는 말은 '이건 꼭 봐야 하는 영화', '꼭 잘돼야 하는 영화'다. 이런 영화는 결국 영화를 '정치수단'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전에 논란된 영화들을 보면 결국 PC함에 갖혀서 영화는 선동이 되고 다큐가 되고 그렇게 아무것도 안남는 영화가 허다했다. 최근 나라가 하수상해서 그런 영화가 몰아쳤는데, 사실 매우 많이 불편했다. 시나리오도 별로, 앵글도 별로, 하지만 우리는 착한 '의지'를 가지고 만들었으니 꼭 봐주세요 이런 느낌이라.

나는 영화를 보러 돈을 내고 들어가고, 그 영화가 끝나고 나서 정치적 이슈에 대해 논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건 뭐, 정치적으로 동의한다면 꼭 보러가야 함 식으로 주입된 영화라 오히려 반감이 빡.

3.
영화는 본질적으로 예술이다. A라는 주장을 A라고만 영화에서 말한다면 그냥 그건 영상 기록물밖에 안된다. 그것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은유를 쓰던가, 아니면 영상적으로 남는 거라도 하나 남겨놓던가.

"우리는 이렇습니다" 하고 우어어 소리만 질러대는 영화를 보면 아무리 좋은 뜻이라도 폭력적이라고밖에 생각이 안된다.




정치 영화라도 사람들을 선동하려면 잘 만들어야 된다.
의지의 승리를 독일 여행가서 처음 봤는데, 솔직히 이거 보고 베를린 보니까 나도 모르게 뭔가 오오 하는 게 생겼다. 이런게 진짜 무서운 거고 이런 게 제일 위험하다.

근데 뭣도 아닌 액션 영화 하나에 이건 '관제영화'다 이런 수준으로 떠드는 건 좀 창피하다. 그렇게 말하는 쪽에서 만드는 영화는 거의 PC함에 갖혀서 주장만 담은 선전물인 경우가 더 많았으니까.

4.
마이클 무어도 사실 안좋아하지만, 그래도 그 영화가 나올 때마다 꼭 챙겨보는 건 적어도 영화 문법에는 맞는 영화를 만들어서다.
무조건 사실만 나열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기승전결도 넣고, 감독이 워낙 관종이라 이번에는 또 무슨 얘기를 떠드려나 궁금한 것도 사실.

영화는 무시하고 감독만 남는 몇 '고발영화'를 볼 때마다 항상 '당신은 마이클 무어가 아닙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5.
지금 글이 엄청 날서있는데, 일하다가 일이 안되거나 일하다가 파일을 날려먹었거나, 일하다가 빡이 쳤거나 하면 그렇다.

사람은 왜 일을 하고 사는건가. (오늘의 아무말)

Wednesday, August 3, 2016

가족여행

1.
가족 여행은 항상 아름답지만은 않다.
항상 '가족이니까' 잘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가족이라서' 맞춤을 당연히 여기는 경우가 발생하게 되고 그래서 싸운다.

친구면 그냥 여행가서도 쌩하고 갈라서서 따로 다닐 수도 있겠지만 집에 함께 돌아가야 하는 가족은 그럴 수가 없다. 참아야지 참아야지 하면서 가는 사람도 있지만 나처럼 짜증과 불만을 내재화한 사람은 그냥 이 짜증을 사방팔방 다 튀겨내고 만다. 항상 그랬다. 내가 문제다.


2.
나는 여행이 새롭지 않다. 영국에 있을 때 석 달에 한 번은 외국을 나가려고 했고, 그게 아니면 런던이든 어디든 계속 돌아다녔다. 홍콩에 있을 때도 광저우를 가거나 마카오를 가서 내 여권은 다른 가족보다 좀 더 빼곡하게 채워졌다.

국내 여행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ㅁㅁ, 제2의 ㅁㅁ라는 곳들이 넘쳐나지만 대부분 그 오리지널리티를 봤기 때문에 그냥 시큰둥하다. 비행기를 타거나 낯선 곳을 갔을 때 느껴지는 신선함이 별로 없고 모든 게 기시감이 느껴져서 재미가 없다.

가장 힘든 건 음식들. 나는 향이 풍부한 음식들보다는 플라스틱향이 느껴지는 정크푸드에 길들여진 입맛이라 생선도 안먹고, 향이 강한 김치도 못먹는다. 여행에서는 평소보다 음식을 덜 가리는 편인데, 생선만큼은 도저히 못먹겠어서 생선이 주류인 나라 (eg. 스페인, 포르투갈 혹은 이베리아 반도)에 가면 살이 빠져서 온다. 이번 여행지는 또 통영이었다. 통영은 바다고 바다는 생선. 또 고생할 게 보였다.


3.
아빠도 여행을 좋아한다. 아니 아빠는 새로운 걸 하는 걸 좋아한다. 새로운 음식이 나오면 꼭 먹어봐야 하고 전시가 시작하면 꼭 가봐야 한다. 나름 '세련된' 취향이라고 생각하고 그게 내 감성을 기르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문제는 아빠는 직접 하는 데 약하다. 그리고 '하고 싶다'는 사실이 앞서나가서 '같이 왔다'는 사실을 잊을 때가 종종 발생한다. 꽃보다 할배의 이순재처럼 슝 혼자 나가는데 문제는 거기서 누군가의 조력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는 거다.

이런 점 때문에 여행에서, 특히 해외에서 아빠랑 꽤 트러블이 잦았고, 일본에서는 엄청 싸웠다. (속으로 내가 다시 가족여행을 오면 월북한다... 이 생각도 했다.)


4.
엄마는 여행을 가면 항상 준비가 완벽하다. 이것도 챙기고 저것도 챙기고, 가방에는 항상 우리 짐까지 들어가있다. 몇 번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이제 니네 짐은 니가 들어'라고 하지만, 결국 엄마 가방에는 우리 신분증, 폰, 그리고 몇몇 필요한 것들을 찾을 수 있다.

엄마랑 부딪히는 경우는 사실 엄마랑 직접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내가 하도 아빠한테 짜증을 내서 '지금 아빠한테 뭐하는 짓이야' 하면서 간접적인 문제다. 물론 내가 정말 싸가지도 없고, 그래서 아빠한테 오만상을 다 찌푸리면서 여행와서까지 짜증을 내고.. 그랬던 건 사실이지만 엄마랑 싸우면 그게 더 커진다.

불과 불이 맞붙으면 불똥이 사방팔방으로 튀는데 그렇다... 엄마랑은 안싸우는 게 최선이다. 태국에서 엄마랑 정말 따로 갈뻔 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서 엄마랑 붙을 징조가 보이면 이제 내가 피한다. 20년 이상 엄마랑 살면서 배운 건 이거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은 피하는 게 이기는 거다. 엄마한테는 이길 수가 없다.


5.
동생들은 사실 무난무난한 성격이다. 딱히 가리는 음식 없이 거기 가면 그거 먹고 저기 가면 저거 먹고, 어디서든 잘 자고,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휴가나온 이일병(인지 이병인지 여튼 군인)은 부대에서 대전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성심당 빵을 가득 안고 나타났고, 끊임없는 식욕으로 나를 놀라게 했다. 그래도 이제 좀 컸다고 짐을 먼저 잡아들고 가는 거 보면 '애는 착하다.'

여동생은 그냥 잘 맞춰주는 성격이기도 하고, 여튼 나보다는 착하다. 다들 나보다는 착하다는 데 포인트가 있다. 이렇게 쓰고 보면 내가 문젠데...



6.
그래도 이번 여행은 신기하게 잘 흘러갔다.
국내외를 거치면서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고, 그래서 그런지 나도 어느 정도는 내려놓고, 회를 먹을 때는 옆에서 소세지를 구워먹었고, 생선탕을 먹을 때 옆에서 혼자 조용히 성심당 빵을 뜯었다.

아침에 커피 드리퍼까지 준비한 덕에 나름 만족할만한 시작을 해서 그런지 그냥 모든 게 아름다웠다. 바다가 보이는 콘도에서 핸드드립으로 내린 커피 한 잔 마시고 나면 다 참을만 하다. 아 이게 참 단순한거였는데 왜 지금까진 이걸 모르고 그냥 없는거에만 짜증을 냈을까. 결국 모든 건 다 커피의 문제였던건가. (마지막 가족 여행은 캄보디아였는데 그때 커피가 정말 최악의 커피 3선안에 꼽을 수 있다. 커피에서 오이향이 났다)

더웠지만 생각보다 버틸만 했고, 아빠도 앞서나가기 보다는 어느 정도 가족과 함께 속도를 맞췄다. 이제 엄마 가방에 모든 걸 구겨넣기보다는 각자 자기 취향대로 가방을 매거나 주머니에 넣는다.

같은 장소에서 3분 이상 못있고 짜증내던 나도 지쳤는지 그냥 털썩 주저 앉는다. 그러고 보니까 여러 모습도 보이고 낄낄대며 동생들이랑 사진도 찍는다. 아마 이번 여행이 가족이랑 사진을 제일 많이 찍은 것 같다. 아빠의 새로산 갤7로 사기도 몇 번 치면서 그렇게 하하호호 하다보니 싸움도 짜증도 줄었다. (없다는 아니다. 줄었다)

생각 이상으로 너무 잘돌아가서 여행하면서 낯설 정도였다. 이제 한 번쯤 터질 때가 됐는데 왜지? 왜지?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엄마가 아팠던 걸 빼면) 너무 순조롭게 잘 흘러갔다.


7.
결국 맞춰짐의 문제다.
요즘 내가 단체 사회성이 결여됐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다. 그동안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성불할 수 있을 만큼 나는 내 중심으로 모든 걸 맞췄다. 나를 굽히기 싫어서 결국 혼자 떠나버리기를 반복했다. 조금만 더 이해하고 참았더라면 이런 정도까지는 안갔을 텐데. 맞춤을 강요하기 보다 내가 조금 더 맞춰졌다면, 계속 이런 후회가 든다.

그런데 장담컨데 나는 아마 다시 여행을 가면 또 싸우겠지. 아마 그럴거다. 사람은 쉽게 안변하니까.. 아 진짜 쓰고 나니까 내가 괴물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