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출장을 다녀왔다. 성수기라 그런지 출국은 30분, 귀국은 40분 지연이 됐고 짐이 나오는 것도 평소의 곱절 이상 걸렸다. 홍콩을 경유해 가는 방콕행 비행기라 그런지 태국 관광객도 많았다.
사와디카- 하는 인사를 듣자마자 내 표정이 풀린다.
영어로 말을 할때면 이상하게 표정이 밝아지고 목소리는 한 톤 올라간다. 이건 홍콩에서부터 시작된 내 생존전략이다. 완벽하지 못한 영어라면 표정이라도 밝게, 무표정한 무서운 '아시안'만 아니면 되지 않나 이런 마음으로 홍콩 첫학기에는 정말 입에 펜 물고 입꼬리 올리는 연습도 했다.
학생증 사진부터 다르다. 홍콩에 도착하자마 찍은 거주증 사진의 입모양이 八자로 축 쳐졌는데 끝날 때쯤에는 v 이렇게 변해있다. 역시 인간의 의지는 대단하다.
홍콩에 내려서 익숙한 캔토를 들으니 내 표정은 더 밝아진다. 비가 올 거라던 날씨도 화창했고, 온도는 한국보다 더 낮았다. 역시 홍콩은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2.
출장 일정은 엄청 간단했다. 원래 거래처도 만나고 그랬어야 했는데 일정이 엉키고 어차피 곧 마켓도 있으니까 굳이 그럴 필요를 못느껴서 정말 회사 모임만 하는 걸로 바뀌었다. 3월에도 홍콩에서 만나서 그런지, 그냥 이젠 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이거 해줘", "응 이건 뭔데?" 이렇게 몇 개 업무 체크나 하고 요즘 나오는 영화도 체크해보고 그러고 끝이다.
이 회사에 있은 지는 3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막내라 뭘 해도 우쭈쭈에 레스토랑에 가서 하나 남으면 다 내 접시 앞으로 온다. 왜냐면 난 아직 어리니까 더 먹어야 하니까...^^ 덕분에 원없이 먹고 그날 펜슬 스커트를 입은 나를 저주했다.
3.
홍콩에 오면 다른 나라에 갈 때보다 마음이 편하다. 외국인이지만 아예 낯설지 않은 곳, 그리고 아시안이라고 해서 차별받지도 않는 외국이라 새벽에도 잘 나다닌다. 밤거리를 걸어도 칭챙총을 들을 일도 없고 괜한 불링을 당할 일도 없다.
그리고 여기서는 모든 걸 내려놓고 친구들한테 기댄다. 마치 정대만이 수비해줄 강백호를 믿고 계속해서 안들어가는 3점슛을 내던진 것처럼, 그냥 '애들이 있으니까' 이 마음으로 편하게 다닌다. 고맙게도 친구들은 이런 나를 여전히 5년이 지나도록 잘 챙겨준다.
첫날 존은 아이스크림 퍼프를 들고 역 앞에서 기다렸다. 만나자마자 폰 옥토퍼스 지갑을 챙기라며 잔소리가 나온다. 어딜 가서도 이렇게 챙김받는 존재가 아닌데 여기만 오면 애들은 나를 마치 자기 동생 챙기듯 챙긴다.
음식점에 가서도, 사실 이제 어느 정도 짬이 차서 대충 읽으면 뭔지 알 수는 있지만 여전히 선택을 미룬다. 이 무슨 초딩 응석인가 하지만 그냥 여기서는 다 받아주는 친구들이 있으니까 맘놓고 더 그러는 걸지도 모른다.
PMQ는 생각보다 그냥 그랬다. 요즘 오래된 건물 바꿔서 예술단지로 바꾸는 건 신기한 일도 아니고, '로컬'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하지만 정작 가격은 로컬이 아니다. 진짜 로컬을 경험하고 싶다면 웡타이신이나 셕킵메이, 아니면 뉴테리토리 이런 데를 가봐야 한다는데 다 동의했다. 그래도 날씨도 좋고 뭐...외국나오면 다 익스큐즈 할 수 있다. 나는 관대하다.
3월 마켓 이후 몇 달만에 만나서 sofohama라는 오가닉 퓨전 레스토랑을 갔는데, 평소 먹던 음식 가격의 두 배다. 학교다닐 때는 쳐다보지 않았을 테지만, 3년차 직장인이라 그런지 둘 다 그냥 좋다고 먹었다. 맛있는 건 잘 모르겠는데 G.O.D랑 콜라보해서 디자인해서 그런지 뭔가 인스타 사진 남기기엔 좋다.
존은 사람을 편하게 해준다. 존 앞에서는 그냥 영어를 잘해야겠다는 생각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뭘 해야한다는 그런 것도 없고, 그냥 다 물 흐르듯 술술 잘 흘러간다.
4.
둘째날 미팅이 다 끝나고 공식 업무를 마치고서는 조이스를 만났다. 전 회사 동료이자 지금은 만나면 레이시즘 조크로 서로를 위안하는 사이다. 조이스는 우산혁명때 트위터에서 꽤 열심히 활동했고, 지금도 중국을 아주 많이 싫어한다.
점심에 딤섬을 엄청 먹어서 저녁은 가볍게 먹어야지 하고 갔는데 만나기로 한 데가 호텔이다. 사실 레스토랑 링크 대강 확인하고 이게 뭐지? 했는데 대강 쪼리에 반바지 입고갈 분위기는 아녔다. 7시쯤 가서 식사를 하면 창가에서 심포니 오브 라이츠도 볼 수 있어서 좋긴 한데 가격은 그렇게 좋지 않다. 둘 다 파운드로 월급받는 처지라 아... 하면서 울 뻔 했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이렇게 먹어야지" 하면서 시켰다.
여기서 먹은 챠슈랑 춘권이 지금까지 먹은 것중에 아마 탑3안에 들 듯. 마지막에 나온 누들은 좀 오일리했고 스테이크는 양이 너무 많아서 (2/3정도만 돼도 될 것 같은데) 먹다가 조금 질리는 느낌도 들었는데, 초반 에피타이저가 정말 너무 맛있었다. 후식은 그냥 쏘쏘. 예전같으면 케이크에 환장하고 퍼먹었을텐데 이제 식욕을 내 몸이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도 먹으면서 계속 "아 행복해" 이 말을 수도없이 반복하며 회사를 퇴사 안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다 먹고 네드 켈리에도 오랜만에 갔는데, 갈때마다 아저씨들은 할아버지가 돼고 오는 손님들도 나이가 많아진다. 그리고 이런 재즈바가 이제 더 이상 신기하지 않아 그런지 사이다 한 잔 하고서 페리타고 LKF로 갔다.
원래 이렇게까지 놀 계획은 없었는데, 그냥 분위기에 취한 것도 있고 미친 듯이 놀던 그때처럼 아직 놀 수 있다는 것에 감탄하면서.. 네 시까지 술먹고 다음날 좀 후회했다. 그때는 정말 매일같이 이렇게 마셨다는건데. 징글징글하다.
5.
셋째날부터는 걷는 게 불편해졌다. 첫째날 밤에 펜슬스커트를 입어보고 힙업운동 안한 게 티가 나서 다음날부터 새벽에 짐에서 스쿼트를 다시 시작했는데. 나는 왜 이역만리 외국땅에서 하지도 않던 스쿼트를 시작한 건지. 게다가 치마입는다고 플랫이 좀 발에 안맞았는지 발에는 물집이 골고루 여덟 개 잡혔다.
그래도 여전히 날씨도 좋은데다 학교다닐때처럼 컨버스+쇼츠+티셔츠를 입으니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라 무작정 걸었다. 몽콕에서 나와서 프린스 에드워드 근처의 플라워 마켓에 갔다. 홍콩 사람들은 꽃을 좋아하기도 하고 (생화가 길하다고 생각해서 어딜 가든 꽃이 많다) 지금 한창 꽃이 싼 철이라 시장은 바글바글했다.
기분이 안좋거나 홍콩이 지긋지긋해질 때 여기 와서 거베라를 색깔별로 사갔다. 장미는 내가 사기엔 거한 느낌이라 항상 분홍 거베라 빨간 거베라를 번갈아가면서 사다가 방에 꽃았다. 그때는 왜 그렇게 홍콩이 싫었나 모르겠다.
6.
점심시간쯤 돼서 지옥같은 MK에서 윙이랑 합류, 무간지옥같은 쇼핑 투어를 시작했다. 몽콕- 조던- TST에서 1차, 그래서 윙은 스탠스미스를 사고 나는 한국인한테 인기 많은 홍콩의 '제니 베이커리' 네 통을 샀다. (집에 와서 무게 재보니 3킬로...난 이걸 들고 하루종일 걸은건가). 사람은 더 넘치고 여전히 담배 연기는 매캐하다. 어딜 가든 이제 한국 가요가 흘러나왔고 시끄럽고 복잡하다.
쇼핑을 마치고 TST 미라몰 옆쪽에 있는 딤섬집에 갔는데 알고보니 그 건물이 알렉스네꺼라고. (어마어마했구나.) 관광객이나 인스타를 노린 캐릭터 딤섬집이었는데 윙이나 나나 둘 다 한 번은 오겠지만 두 번 올 맛은 아니다(지나치게 달고 소가 적다)라는 평을 내렸다. 네이티브가 아니라 딤섬이 어떤 게 맛있는지 잘 몰랐는데, 그래도 몇 년째 먹다보니 맛없는 딤섬집은 좀 알겠더라.
2차 쇼핑은 ifc-CWB. 윙은 이곳저곳 휘저으며 왜 안사냐고 하는데 그 탭을 보면 다 'made in Korea'라 별 재미가 없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 샵 제품도 좀 있고, 프랑스나 영국꺼도 있었는데 지금은 죄-다 한국이다. 명동 2중대같은 느낌이라 그냥 밥이나 먹고 싶었는데 정말 2시부터 8시까지 온갖 곳 다 돌아다니느라 4족보행할 뻔.
윙이랑은 쇼핑에서 잘 맞다가도 안맞는 부분이 있다. 나는 쇼핑을 좋아하지만 2시간 이상은 안하고 그냥 몇 군데 보다가 고민 별로 안하고 사는 스타일이고 윙은 모든 걸 다 보고 사는 편이다. 그래서 내 체력이 방전될 즈음에 윙은 피크에 오르고, 나는 카페에 가자고 징징대고 윙은 거기에 맞추다가 한 번씩 터진다. 이게 처음에는 좀 힘들었는데 홍콩-맨체스터를 거치다보니 이제는 대강 서로가 힘들 즈음이면 "카페갈래?" 하거나 "하나 더 볼까?" 이런 식으로 상대에 맞춰준다.
저녁은 로컬 식당.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다. 나는 중국어 메뉴를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지만, 여전히 '모르는 척'했고 윙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sweet sour &pork'와 초이섬, 팍초이를 주문했다. 예전처럼 연예인 얘기 대신 결혼과 앞으로의 커리어에 대해 주제가 넘어갔지만, 그래도 너무 무겁거나 힘들진 않다. 이렇게 우리가 같이 나이들어가는구나 슬프다가 그 시간을 같이 채워가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7.
홍콩에서 이제 혼자 하라면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다음번에도 중국어를 모르는 척하면서 친구들한테 기댈 것 같다.
도시 곳곳이 (흑역사를 동반한) 감정의 지뢰밭이라 가끔 너무 하이퍼되지만, 그래도 이렇게 아무 걱정없이 떠나올 수 있는 또 다른 공간이 있다는 게 감사하기도 하고.
출장을 다녀왔다. 성수기라 그런지 출국은 30분, 귀국은 40분 지연이 됐고 짐이 나오는 것도 평소의 곱절 이상 걸렸다. 홍콩을 경유해 가는 방콕행 비행기라 그런지 태국 관광객도 많았다.
사와디카- 하는 인사를 듣자마자 내 표정이 풀린다.
영어로 말을 할때면 이상하게 표정이 밝아지고 목소리는 한 톤 올라간다. 이건 홍콩에서부터 시작된 내 생존전략이다. 완벽하지 못한 영어라면 표정이라도 밝게, 무표정한 무서운 '아시안'만 아니면 되지 않나 이런 마음으로 홍콩 첫학기에는 정말 입에 펜 물고 입꼬리 올리는 연습도 했다.
학생증 사진부터 다르다. 홍콩에 도착하자마 찍은 거주증 사진의 입모양이 八자로 축 쳐졌는데 끝날 때쯤에는 v 이렇게 변해있다. 역시 인간의 의지는 대단하다.
홍콩에 내려서 익숙한 캔토를 들으니 내 표정은 더 밝아진다. 비가 올 거라던 날씨도 화창했고, 온도는 한국보다 더 낮았다. 역시 홍콩은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2.
출장 일정은 엄청 간단했다. 원래 거래처도 만나고 그랬어야 했는데 일정이 엉키고 어차피 곧 마켓도 있으니까 굳이 그럴 필요를 못느껴서 정말 회사 모임만 하는 걸로 바뀌었다. 3월에도 홍콩에서 만나서 그런지, 그냥 이젠 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이거 해줘", "응 이건 뭔데?" 이렇게 몇 개 업무 체크나 하고 요즘 나오는 영화도 체크해보고 그러고 끝이다.
이 회사에 있은 지는 3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막내라 뭘 해도 우쭈쭈에 레스토랑에 가서 하나 남으면 다 내 접시 앞으로 온다. 왜냐면 난 아직 어리니까 더 먹어야 하니까...^^ 덕분에 원없이 먹고 그날 펜슬 스커트를 입은 나를 저주했다.
3.
홍콩에 오면 다른 나라에 갈 때보다 마음이 편하다. 외국인이지만 아예 낯설지 않은 곳, 그리고 아시안이라고 해서 차별받지도 않는 외국이라 새벽에도 잘 나다닌다. 밤거리를 걸어도 칭챙총을 들을 일도 없고 괜한 불링을 당할 일도 없다.
그리고 여기서는 모든 걸 내려놓고 친구들한테 기댄다. 마치 정대만이 수비해줄 강백호를 믿고 계속해서 안들어가는 3점슛을 내던진 것처럼, 그냥 '애들이 있으니까' 이 마음으로 편하게 다닌다. 고맙게도 친구들은 이런 나를 여전히 5년이 지나도록 잘 챙겨준다.
첫날 존은 아이스크림 퍼프를 들고 역 앞에서 기다렸다. 만나자마자 폰 옥토퍼스 지갑을 챙기라며 잔소리가 나온다. 어딜 가서도 이렇게 챙김받는 존재가 아닌데 여기만 오면 애들은 나를 마치 자기 동생 챙기듯 챙긴다.
음식점에 가서도, 사실 이제 어느 정도 짬이 차서 대충 읽으면 뭔지 알 수는 있지만 여전히 선택을 미룬다. 이 무슨 초딩 응석인가 하지만 그냥 여기서는 다 받아주는 친구들이 있으니까 맘놓고 더 그러는 걸지도 모른다.
PMQ는 생각보다 그냥 그랬다. 요즘 오래된 건물 바꿔서 예술단지로 바꾸는 건 신기한 일도 아니고, '로컬'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하지만 정작 가격은 로컬이 아니다. 진짜 로컬을 경험하고 싶다면 웡타이신이나 셕킵메이, 아니면 뉴테리토리 이런 데를 가봐야 한다는데 다 동의했다. 그래도 날씨도 좋고 뭐...외국나오면 다 익스큐즈 할 수 있다. 나는 관대하다.
3월 마켓 이후 몇 달만에 만나서 sofohama라는 오가닉 퓨전 레스토랑을 갔는데, 평소 먹던 음식 가격의 두 배다. 학교다닐 때는 쳐다보지 않았을 테지만, 3년차 직장인이라 그런지 둘 다 그냥 좋다고 먹었다. 맛있는 건 잘 모르겠는데 G.O.D랑 콜라보해서 디자인해서 그런지 뭔가 인스타 사진 남기기엔 좋다.
존은 사람을 편하게 해준다. 존 앞에서는 그냥 영어를 잘해야겠다는 생각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뭘 해야한다는 그런 것도 없고, 그냥 다 물 흐르듯 술술 잘 흘러간다.
4.
둘째날 미팅이 다 끝나고 공식 업무를 마치고서는 조이스를 만났다. 전 회사 동료이자 지금은 만나면 레이시즘 조크로 서로를 위안하는 사이다. 조이스는 우산혁명때 트위터에서 꽤 열심히 활동했고, 지금도 중국을 아주 많이 싫어한다.
점심에 딤섬을 엄청 먹어서 저녁은 가볍게 먹어야지 하고 갔는데 만나기로 한 데가 호텔이다. 사실 레스토랑 링크 대강 확인하고 이게 뭐지? 했는데 대강 쪼리에 반바지 입고갈 분위기는 아녔다. 7시쯤 가서 식사를 하면 창가에서 심포니 오브 라이츠도 볼 수 있어서 좋긴 한데 가격은 그렇게 좋지 않다. 둘 다 파운드로 월급받는 처지라 아... 하면서 울 뻔 했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이렇게 먹어야지" 하면서 시켰다.
여기서 먹은 챠슈랑 춘권이 지금까지 먹은 것중에 아마 탑3안에 들 듯. 마지막에 나온 누들은 좀 오일리했고 스테이크는 양이 너무 많아서 (2/3정도만 돼도 될 것 같은데) 먹다가 조금 질리는 느낌도 들었는데, 초반 에피타이저가 정말 너무 맛있었다. 후식은 그냥 쏘쏘. 예전같으면 케이크에 환장하고 퍼먹었을텐데 이제 식욕을 내 몸이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도 먹으면서 계속 "아 행복해" 이 말을 수도없이 반복하며 회사를 퇴사 안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다 먹고 네드 켈리에도 오랜만에 갔는데, 갈때마다 아저씨들은 할아버지가 돼고 오는 손님들도 나이가 많아진다. 그리고 이런 재즈바가 이제 더 이상 신기하지 않아 그런지 사이다 한 잔 하고서 페리타고 LKF로 갔다.
원래 이렇게까지 놀 계획은 없었는데, 그냥 분위기에 취한 것도 있고 미친 듯이 놀던 그때처럼 아직 놀 수 있다는 것에 감탄하면서.. 네 시까지 술먹고 다음날 좀 후회했다. 그때는 정말 매일같이 이렇게 마셨다는건데. 징글징글하다.
5.
셋째날부터는 걷는 게 불편해졌다. 첫째날 밤에 펜슬스커트를 입어보고 힙업운동 안한 게 티가 나서 다음날부터 새벽에 짐에서 스쿼트를 다시 시작했는데. 나는 왜 이역만리 외국땅에서 하지도 않던 스쿼트를 시작한 건지. 게다가 치마입는다고 플랫이 좀 발에 안맞았는지 발에는 물집이 골고루 여덟 개 잡혔다.
그래도 여전히 날씨도 좋은데다 학교다닐때처럼 컨버스+쇼츠+티셔츠를 입으니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라 무작정 걸었다. 몽콕에서 나와서 프린스 에드워드 근처의 플라워 마켓에 갔다. 홍콩 사람들은 꽃을 좋아하기도 하고 (생화가 길하다고 생각해서 어딜 가든 꽃이 많다) 지금 한창 꽃이 싼 철이라 시장은 바글바글했다.
기분이 안좋거나 홍콩이 지긋지긋해질 때 여기 와서 거베라를 색깔별로 사갔다. 장미는 내가 사기엔 거한 느낌이라 항상 분홍 거베라 빨간 거베라를 번갈아가면서 사다가 방에 꽃았다. 그때는 왜 그렇게 홍콩이 싫었나 모르겠다.
6.
점심시간쯤 돼서 지옥같은 MK에서 윙이랑 합류, 무간지옥같은 쇼핑 투어를 시작했다. 몽콕- 조던- TST에서 1차, 그래서 윙은 스탠스미스를 사고 나는 한국인한테 인기 많은 홍콩의 '제니 베이커리' 네 통을 샀다. (집에 와서 무게 재보니 3킬로...난 이걸 들고 하루종일 걸은건가). 사람은 더 넘치고 여전히 담배 연기는 매캐하다. 어딜 가든 이제 한국 가요가 흘러나왔고 시끄럽고 복잡하다.
쇼핑을 마치고 TST 미라몰 옆쪽에 있는 딤섬집에 갔는데 알고보니 그 건물이 알렉스네꺼라고. (어마어마했구나.) 관광객이나 인스타를 노린 캐릭터 딤섬집이었는데 윙이나 나나 둘 다 한 번은 오겠지만 두 번 올 맛은 아니다(지나치게 달고 소가 적다)라는 평을 내렸다. 네이티브가 아니라 딤섬이 어떤 게 맛있는지 잘 몰랐는데, 그래도 몇 년째 먹다보니 맛없는 딤섬집은 좀 알겠더라.
2차 쇼핑은 ifc-CWB. 윙은 이곳저곳 휘저으며 왜 안사냐고 하는데 그 탭을 보면 다 'made in Korea'라 별 재미가 없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 샵 제품도 좀 있고, 프랑스나 영국꺼도 있었는데 지금은 죄-다 한국이다. 명동 2중대같은 느낌이라 그냥 밥이나 먹고 싶었는데 정말 2시부터 8시까지 온갖 곳 다 돌아다니느라 4족보행할 뻔.
윙이랑은 쇼핑에서 잘 맞다가도 안맞는 부분이 있다. 나는 쇼핑을 좋아하지만 2시간 이상은 안하고 그냥 몇 군데 보다가 고민 별로 안하고 사는 스타일이고 윙은 모든 걸 다 보고 사는 편이다. 그래서 내 체력이 방전될 즈음에 윙은 피크에 오르고, 나는 카페에 가자고 징징대고 윙은 거기에 맞추다가 한 번씩 터진다. 이게 처음에는 좀 힘들었는데 홍콩-맨체스터를 거치다보니 이제는 대강 서로가 힘들 즈음이면 "카페갈래?" 하거나 "하나 더 볼까?" 이런 식으로 상대에 맞춰준다.
저녁은 로컬 식당.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다. 나는 중국어 메뉴를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지만, 여전히 '모르는 척'했고 윙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sweet sour &pork'와 초이섬, 팍초이를 주문했다. 예전처럼 연예인 얘기 대신 결혼과 앞으로의 커리어에 대해 주제가 넘어갔지만, 그래도 너무 무겁거나 힘들진 않다. 이렇게 우리가 같이 나이들어가는구나 슬프다가 그 시간을 같이 채워가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7.
홍콩에서 이제 혼자 하라면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다음번에도 중국어를 모르는 척하면서 친구들한테 기댈 것 같다.
도시 곳곳이 (흑역사를 동반한) 감정의 지뢰밭이라 가끔 너무 하이퍼되지만, 그래도 이렇게 아무 걱정없이 떠나올 수 있는 또 다른 공간이 있다는 게 감사하기도 하고.
재미있게 보내다 오셨군요..!
ReplyDelete우리 또 갈거잖아요. 물론 그때는 책임감있게 홍콩을 보여드립니다. 친구들이랑 다닐때는 진짜 모지리팔푼이 박선배가 따로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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