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 영화에 대한 평가 기준이 꽤 높다.
헐리웃 영화가 그냥 저냥정도 하면 오 괜찮네 하고 넘어갈 걸 한국영화가 그러면 "아오" 하면서 욕이 튀어나온다.
왜냐면 일이니까. 이걸 보고 나는 다시 어떻게 '이 영화를 선정해야 하는 이유'를 수북히 빼곡히 채워낼 수 있을지 고민해야하니까. 사실 상업영화는 그냥 '재밌다', '통쾌하다' 이정도가 다 아닌가. 근데 그걸 이 영화는 왜 이게 재밌고 왜 이게 이래서 이래야 하고... 아이고. 그냥 잘 때려부수고 재밌고 신난다. 이렇게만 쓰고 싶은데 그랬다가 나는 짤릴거야.
2.
탐정 홍길동은 한 열 번 봤다. 첫 선재때, 그리고 지금 오늘 다시. (스크리닝이 싫은 게 아무리 별로인 영화라도 자막 검사+씬 검사 하려면 이만큼 봐야한다...)
올해 아까운 영화로 꼽으라면 1번은 아마 <탐정 홍길동>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 영화는 괜찮다. (비밀은 없다랑 둘이 아마 싸우겠다. 그러고 보니 다 CJ네?)
씬시티 좋아하는데, DC 코믹스 느낌도 나고, 세트장 곳곳에서 늑대소년 느낌도 나고 (파스텔톤과 씬시티 흑백 씬이 섞인 느낌)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 '판타지' 랄까.
이제훈이 영화 내내 나레이션을 하는데 시그널에서 보던 그 '쪼'가 없어서 좋았다. 내가 파수꾼에서 느꼈던 그 차가운 느낌이 여기서도 잘 나와서 이제는 말랑말랑한 첫사랑보다 이런 장르영화에서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순이는 민폐 캐릭터가 아니라 거의 먼치킨이다. 아니 그냥 존재감 1위. 짜장면 먹을 때랑 '박두칠' 대사는 영화에서 제일 웃겼다. 자막으로 잘 전달됐으려나, 이거 웃긴데 못알아들으면 어쩌지 발 동동 구를 정도.
3.
영화의 배경은 분명히 가상의 공간이 맞는데 기시감이 느껴지는 사건들이 많다.
광은회 (GU Group으로 자막처리 되어있던데 은이면 Eun일텐데 GE를 피하고자 하는 선택인가?) 장군과 뉴스 영상은 정말 대한민국에서 30년전에 보던 것과 똑같아보였고, 대의를 위해 짜고 사람을 학살한다는 건 근현대사에서나 보던 백색테러였다.
이런 면에서는 판의 미로랑 비슷하다. 직접 대놓고 '이 역사가~' 하면서 썰풀려면 왜 굳이 영화로 그 얘기를 하나. 다큐 찍으면 되지. 잘 찍은 기록영화가 될 수도 있겠지만, 상업영화에서 이런 얘기를 세련되게 하기 위해서는 홍길동 식 스토리텔링이 더 적합한 것 같다.
4.
사실 이런 얘기를 왜 홍길동을 차용해서 하나? 할 정도로 이해가 안됐는데 마지막에 오... 그래서였구나 하고 다 실타래가 풀렸다. 홍길동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가 '호부호형'인데 이것도 없이 그냥 이름만 홍길동이었나 했는데 마지막에 오.
약간 작위적인 느낌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주요한 테마도 잃지 않고, 이제 이게 시리즈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까지 열어놓은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5.
상업영화를 재밌게 보려면 아무 생각 없이 극장에서 제돈 주고 보는 건데. 이렇게 몇 번씩 사소한 자막에나 집중하면서 보니까 연기도 안보이고 화면 구성도 안보이고 스토리 전체도 안보이고. 언제쯤 재밌게 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