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November 8, 2017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The Bridges of Madison County, 1995)

1.
초등학교 저학년때, 그러니까 아직 만화책을 읽지 않았을 때다.(나름 교사 자녀라 만화책은 엄마랑 학교 따로 다니던 5학년부터 읽기 시작했다.) 

주말의 상처럼 엄마는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비디오 한 편을 빌려주셨다. 청구 아파트 비디오 가게 아저씨랑 친해져서 비디오가게에 들어오는 카달로그+일요일 아침에 영화프로그램에서 나오는 영화를 비교해가면서 도장 격파하듯 매주 영화를 봤다. 엄마꺼, 내꺼 해서 두 편씩 봤던 것 같다.

대개 15세까지는 보게 해줬는데, 이날 이 영화를 고른 엄마는 내 영화를 먼저 마치고 "넌 빨리 자"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좋아할 만한 배우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뭔가 흥미로워 보이는 영화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엄마나 아빠는 "영화는 별로"였다고 했다.


2.
그리고 대학와서 1학년 즈음인가? 다시 지적 허세에 빠져서 영화 DVD 도장격파를 하고 있을 때 이 영화를 봤다.

보다가 껐다. 그 때 나는 A 아니면 B, 그러니까 모 아니면 도, 1 아니면 0, 흑과 백, 그렇게 분명한 세계에서 살고 있어서 이런 'affair'가 왜 명작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가족은? 결국 다 속인 거잖아. 아니 그것보다 왜 남편도 있는 사람이 뭐가 좋다고 저런 깡마른 아저씨한테? 

'내가 좋아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이럴 리 없어' 라는 생각에 원작 소설도 읽어봤지만 '불륜 미화' 그 이상 이하도 아닌데, 역시 쯧쯧, 예술은 moral-less 라면서 끝까지 못 봤다. (비슷한 느낌으로 대학교 때는 화양연화에서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


3.
오늘 영화를 보면서 내가 이렇게 잘 우는 사람이었나? 싶었다. 렌즈는 또 빠졌다. 일회용이라 다행이다.

몇 년 동안 또 몇 번 아프고, 좀 바닥도 치고 나서야 프란체스카가 왜 처음 만난 로버트에게 끌릴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됐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꿈을 물어봐 주길 원하고, 그 꿈을 인정받고 싶어한다. 그런데 가족, 함께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이 가장 기본적인 욕구에는 무관심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 공기처럼 기본 값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묻지 않았고 알아채려 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The old dreams were good dreams; they didn't work out, but glad I had them"
이라면서 처음으로 꿈을 말하는 낯선 사람이 말을 건다. 

우주의 먼지 마냥 하찮은 존재처럼 느껴지는 자신에게 "you are anything but a simple woman"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그 사람에게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4.
역시 그 빌어먹을 꿈이 문제다. 
내가 좋아했던 건 그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내 꿈을 대신 봐준' 그 사람이었을까. 

Sunday, August 20, 2017

천수위의 낮과 밤 (天水圍的日與夜, The Way We Are, 2008)

1.
천수위라고 하니까 어디지 했는데 한자를 읽어보니 아 틴수이와이~

위엔롱에서 쫌 더 올라가면 있던 습지 공원 있는 동네라는 기억밖에 안난다. 사실 가보지도 않았다. 고작 1년 채 안되는 기간에 홍콩의 모든 동네를 다 돌아볼 수도 없고, 홍콩에서 그렇게 중요한? 곳은 아니라 가볼 일도 딱히 없다.

서울을 아무리 살아도 저기 중랑천을 걸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테고, 은평구 끝자락이나 금천구 끝자락을 안가본 사람도 있을테니까.

뉴 테리토리는 딱 그런 동네였다. 중국 넘어가기 전 지나가는 동네,  "중국에서 홍콩으로 넘어온 이민자 공용 주택이 밀집한 지역"이라고 설명돼 있고, 레드 하우스가 아니었다면 나도 굳이 찾아가진 않았을 동네다.

2.
천수위의 낮과 밤은 이상적인 홍콩 로컬의 모습을 보여준다.
홍콩하면 금융 허브, 외국인이 더 많은 곳, 국제 도시거나 아니면 침사추이 미라도-청킹처럼 보이는 아주 오래된 도시 이미지로 양분된다.

그런데 여기도 사람사는데라 이렇게 극단적이기보다는 중간의 쩜오같은 공간과 사람들이 더 많다. 로컬하면 생각하는 오래됨과 도시 하면 생각하는 화려함으로 양분하기 보다는 그냥 그 중간에서 보통 사람들은 먹고 자고 산다. 웡타이신이나 삼수이포로만 빠져도 생각보다 외국인 안보이고 영어가 잘 안통한다. 홍콩섬은 이런 지역이 적지만, 카오룽쪽은 올라가면 올라갈 수록 이런 동네가 흔하다.

영화가 촬영된 곳은 거의 다 틴수이와이고 주인공이 일하는 슈퍼도 시티나 m&s같은 느낌이 아니라 웰컴같다. 일본 홋카이도산 우유보다는 카오룽 우유 팔 것 같이 생긴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 영화에서 외국인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영어 이름을 쓰지 않고 캔토니즈 이름을 쓴다. 아침마다 차찬탱 딤섬을 먹는 게 아니라 비닐백에 담긴 아침을 사다가 먹고, 신문을 살 때는 꼭 파란색 티슈를 챙겨받는 사람들의 모습. 귀여운 캐릭터에 환장하고. 정말 홍콩 로컬이라면 이런 사람들 같다.

홍콩이라는 이미지에 떨어지는 장면보다는 이렇게 사람사는 곳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다보니 가장 멀리 빠진 곳은 샤틴이다. 샤틴은 뉴테리토리랑 카오룽의 경계같은 곳인데 관광객을 위한 호텔도 이 이상은 넘어가지 않는다. 뉴타운 플라자나 만불사, 이케아를 가기 위해 가는 사람이 드물게 있겠지만...

3.
기대하지 않았던 영화였는데 이번 특별전에서 두 번째로 좋았다. (제일 좋았던 영화도 역시나 허안화 감독의 심플 라이프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소박함이 구질구질함이 되지 않고, 착함이 호구가 되지 않는 시대였다. 남을 돕는 것에서 계산을 하지 않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고, 모자간에 대화가 흘러넘치지는 않았어도 적어도 서로의 말을 귀기울여 들을 수 있는 배려심이 남아있었다.

혼자 사는 할머니에게 일자리를 소개해주고 바로 일자리를 구할 수 있고 (지금 이건 기적과 같은 동화다), 이 할머니는 비싼 버섯을 선물하고 다시 고맙다며 금반지 은반지를 선물하는. 너무 착하고 고요하게 흘러가서 실제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모습이 판타지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4.
2008년까지만 해도, 그러니까 이 영화가 만들어질 즈음만 해도 세상은 이렇게까지 각박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1000유로가 한 세대를 지칭하는 단어가 될 줄은 몰랐고, 월가를 점령할 지도 몰랐다.

홍콩의 경우는 그 변화가 더 크다. 점점 더 중국의 영향력은 커지면서 뉴테리토리 슈퍼의 식료품이 다 사라지고, 집값이 폭등하고 우산을 들고 거리에 나서거나 피쉬볼을 던지면서 싸울 거라고 예상했을까? 아마 주인공 가온이 자랐다면 분명 우산을 들고 피쉬볼을 던지는 나이 또래였을텐데 착했던 그 주인공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5.
영화에서 본 착한 홍콩 사람들은 사실 홍콩에만 있는 건 아니었을거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이제 이게 변수가 아니라 상수가 된 것 같지만) 친절한 동네 가게 아주머니는 프랜차이즈 가맹비에 헉헉대는 점주, 운이 나쁘다면 그 밑에서 일하는 알바가 되었을지도 모르고.

영화가 좋았던 건 홍콩을 봐서가 아니라 (사실 내 홍콩에 대한 기억은 뉴 테리토리보다는 부자동네인 카오룽이라 조금 다르다) 따뜻했던 그 시절을 볼 수 있어서인 것 같다.

이걸 정이라고 포장하지도 않고, 극적 사건들을 만들어가며 억지 감동 감정과잉 서사도 없지만, 잔잔하게 흘러가는 러닝타임동안 착한 사람들이 착하게 살아가는 '이야기'가 좋았다.

6.
영화 제목은 원제도 마음에 들지만 영어 제목도 마음에 든다. 천수위 사람들의 낮과 밤, 그리고 우리가 사는 법. 특별할 건 없지만 낮과 밤이 흘러가면서 잔잔히 보이는 그 사람들의 모습이 제목에 잘 담겼다.


Thursday, August 10, 2017

첨밀밀 Comrades: Almost a Love Story (1996)

1.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고 피천득 선생은 썼다.

이 구절을 처음 본 건 교환학생 끝날 즈음. 돌아가는 것에 대한 불안함과 헤어지는 아쉬움때문에 매일을 나라 잃은 백성처럼 매일 술을 마셨다. 그러고 보니 나는 2011년에 이미 탈조선을 생각했던 거다.

나한테는 한 번 만난 것도 아니고, 다시 안 만나는 사이도 아니지만 항상 그리운 사람과 장소가 있다.


2.
첨밀밀을 볼 때마다 피천득 선생의 글귀가 겹쳐진다.

같은 마음이었고, 같은 장소에 있지만 자꾸 엇갈리는 둘을 볼 때마다 자꾸 "여기서 고개를 돌렸더라면", "그때 조금만 늦게 갔더라면", "그때 더 붙잡았더라면", 그런 생각을 해본다.

만약에 이교가 호출기를 받았더라면, 소군은 소정과 결혼하지 않았을거고, 이교가 대만행 배를 타지 않았더라면 멀리 떨어지는 일도 없었을 거고, 소군이 차찬탱 안에서 밖을 내다봤더라면 그 둘의 만남은 더 빨라졌을 수도 있다. 자전거를 탄 소군이 옆을 둘러봤더라면 간절히 내달리던 이교를 태워줄 수도 있었을 거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번의 엇갈림이 있었지만 만났다.
만날 사람은 만나는 거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가 막히게 극적으로 등려군 사망 방송이 나오는 가게 앞에서 만난다.

나는 이 때 여명의 표정이 제일 좋다. 살짝 떨떠름한 것 같은 표정 속에 너무 놀라지도 않고 너무 무심하지도 않게, 그냥 덤덤하게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 같은 그런 마음이 담겨 있어서 장만옥의 울 것 같은 얼굴보다 더 기억에 남는다.


4.

이 맥도날드를 같이 갔던 친구들은 지금 뭐하고 있을까. (위챗에서 방금까지도 낄낄대고 얘기했지만).

그냥 그 때 생각을 하면 '나만 이렇게 그리운가' 하는 서운함도 들고, 나만 계속 과거를 돌아보는 것 같아서 이젠 그만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5.
영화를 처음 본 건 고등학교 입학하면서  중국어를 처음 시작할 때였다. 그때는 이 영화에 캔토니즈가 섞여있고, 장만옥이나 여명이 하는 중국어 발음이 내가 나중에 배울 보통화랑은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도 몰랐다. 정말 '중알못'인 상태였지만 등려군이 대만사람이라 위에량다이비야오워'디'신이라고 배운 건 지금도 기억난다.

다시 보니까 그래도 쫌 짬이 찼다고 중국어 대사가 들린다. 캔토도 뭐라고 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드문드문 단어가 툭 귀에 박힐 때마다 그동안 주워들은 게 공으로 날아가진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도 들고.


6.
사람과의 관계가 인연인건지, 아니면 나 혼자 인연이라고 생각하고 꾸역꾸역 붙잡고 있는건지 요즘은 잘 모르겠다.

인생은 타이밍, 인연은 때, 호우는 지시절하는데, 이 관계는 도대체 어떻게 될까.


7.
첨밀밀이랑 비슷한 한국 영화는 호우시절이 최고다. 돌아오고 나서 두 영화를 같이 보면서 피천득 수필집 엄청 읽었는데.

지금도 비슷한 걸 보니 주어진 인연보다는 내 의지가 좀 더 강한건가. 

Friday, July 7, 2017

상반기

1
출장 두 번 갔다오니 1Q 끝나고, 2Q는 정말 뭘 했는지 기억에서 지워졌다.

대개 2Q에는 생일 전후로 우울해하다가 도피성 비행기 티켓을 끊고 유럽 거지가 돼서 다니다 한국 와서는 "역시 한국 인터넷이 짱짱맨" 하면서 다시 한국에 만족하는 삶을 살곤 했는데.

발레는 여전히 재밌지만 아직도 기초 자세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있으며 (내 몸이 죄인), 몸의 비대칭이 심해져서 몸 교정도 하고 있다. 그러나 끝나고 다시 침대에 구부정하게 누워 일하면서 그 자세를 원상복귀시키고 있는 게 함정이라면 함정.


2
상반기 기억에 남는 것들


정당의 생명력 - 영국 보수당
제일 재밌었던 책. 새누리의 미래는 토리고, 토리의 미래는 새누리, 이건 무슨 평행이론도 아니고.

토마스 쿡 콘서트 JOURNEY
시험끝나고 발레갔다가 공연까지 가는 열정이 1Q까지만 해도 있었지. 쿡이랑 사진 찍었는데, 정말 사랑과 기침은 감출 수가 없다는 게 사진에서 너무 잘 드러남

하프 마라톤
2시간 30분이 목표였는데 2시간 20분 38초로 끊었다. 중간에 화장실만 안갔어도 2시간 10분으로 끊을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 페이스 조절 못하고 주는 물, 음료 두 잔씩 받아먹어서 마라톤 뛰고 살이 더 찐 느낌이었다.

탄핵-대선
어쩌다보니 헌재, 투표장에서 통역하고 있어서 현장을 봤다. 아무 느낌도 없었고, 앞으로 다가올 혼란과 대립에 머리가 아팠다. 그래도 1곰1 

군산
친구들이랑 처음으로 간 여행. 술을 겁나 먹고 말이 많아졌다. 이런 여행을 좀 더 어렸을 때 갔다면 더 좋았을텐데.

콜드플레이
1년만 더 늦게 왔으면 지정석 갔거나 영상 봤을 듯.


3
상반기는 이렇게 끝.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잠 자는 게 아깝다고 생각했는데, 상반기는 하고 싶은 게 없어서 힘들었다. 잠은 안오는데 딱히 뭔가 할 건 없고, 생각은 많아지고 겁도 나고.

이제 결정할 타이밍도 다가오는데, 모르겠다. 에이. 홍콩이나 한 번 갈까. 간다고 해놓고 지금 3개월째 티켓 예약 취소만 반복하다보니 친구들한테는 뻥카만 날린다고 쿠사리만 먹는다.

Sunday, April 2, 2017

어느날 (One Day, 2017)

1.
당연하다는 것은 사람을 무디게 한다. 공기처럼 늘 기본값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이 주는 가치와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지나치게 된다. 그러나 만약 이 당연함이 사라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갑자기 한 감각을 느낄 수 없다면, 그 감각이 세상을 인지하는데 얼마나 중요했는지 느낄 수 있고, 늘 옆에 있던 사람이 내 곁을 떠난다면 그들이 내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가졌는지 깨닫게 된다. 마지막 순간에 가장 소중해지는 것은 결국 늘 함께해온 것이다. <어느날>은 항상 당연하게 있기에 그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던 일상의 순간을 바라본다.  

2.
보험조사관 강수는 사랑하는 아내를 사고로 한순간에 잃었다. 병으로 오랜 시간 투병하던  아내가 죽었지만, 그는 힘들어하는 내색 없이 다시 업무로 복귀한다. 처남에게 뺨을 맞고, 주변 사람에게 독하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그의 슬픔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그가 오랜 시간 동안 아내를 간병하며 지쳐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슬픔을 드러내는 순간 상실감이 더 커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냉장고에서 꺼낸 김치에서 아내와의 기억이 생각나는 것처럼 그가 마주하는 모든 일상은 이제 추억의 지뢰밭이 되어 그를 괴롭힌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는 슬퍼하지 않고, 아내의 모습을 떠올리려 하지 않는다. 슬퍼한다 해도 이미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3.
시각장애인 미소는 평생을 보지 못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시각 장애를 가지고 있던 그녀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엄마도 목소리로만 기억한다. 자신을 돌봐주던 사람도 촉각으로만 기억하고, 주변의 모든 것을 시각을 제외한 감각으로만 느끼고 인지한다. 불완전하던 미소의 감각은 교통사고로 죽음과 맞닥뜨리며 완전해진다. 코마 상태에 빠져 육체와 분리된 그녀의 영혼은 다시 태어난 것처럼 눈부신 세상의 빛과 마주하게 된다. 비장애인에게는 매일 지나치기 때문에 놀랍지 않은 기차 같은 전철과 내달리는 오토바이의 모습에도 놀라워하고 기뻐하며, 불완전한 영혼으로나마 완전한 감각을 누린다. 그녀가 직접 보고싶었던 것은 살면서는 볼 수 없었던 블루하와이 색깔과 비슷한 바다일 수도 있고 영화관에서 두 눈으로 보는 영화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가 가장 보고 싶던 것은 목소리와 손끝으로만 기억하던 사랑하던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4.
벚꽃이 흩날리는 길을 처음 보고 기뻐하는 미소의 모습과, 이를 보면서 아내와의 추억을 되새기는 강수의 모습은 각각 현재의 순간과 과거의 기억으로 대비된다. 미소가 느끼는 기쁨처럼 현재의 환희는 영원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를 느끼는 미소는 완전한 삶도, 완전한 죽음도 아닌 그 사이에 놓였다. 현재의 기쁨도 영원할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미소의 상태처럼 불완전한 것이다. 시간이 더 흐르면 결국 그 순간도 과거가 되어 기억이 돼버리고, 그 기억은 희미해지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소중했던 기억은 흐려질 수는 있지만, 사라지지는 않는다. 아내를 잃은 후 함께했던 기억을 억지로 눌러놓은 강수가 행복한 순간을 떠올리는 순간, 한구석에 자리 잡았던 기억은 다시 현실이 된다. 오히려 현실에서는 피할 수 없는 삶의 무게감을 덜어내고 좋았던 감정만을 떠올리기도 한다.

5.
<어느날>은 시각장애인이 죽음에 가까워져서야 세상을 본다는 이야기에서 출발해 일상의 특별함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러나 강수와 미소라는 두 주인공 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일상적이지도, 특별해 보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일상을 재발견하던 영화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이야기를 통속적으로 바꿔버린다. 병원에서 만난 아이와 보험사기꾼의 이야기는 영화에 가장의 의무감이라는 엉뚱한 주제를 덧대 무겁게 바꿔 극의 전체 흐름을 끊는다. 주인공 캐릭터에만 더 집중해 기억과 감각이라는 두 일상적인 가치를 강조했더라면 영화의 흐름이 더 일관적이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6.

사람은 당연한 존재, 당연한 상황이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진 후에야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친 이들과 상황들이 사실은 매 순간이 특별했다는 것을 상실을 경험하고 나서야 알 수 있다. 강수와 미소의 만남은 일상의 당연함을 상실하고 상처받은 이들이 서로를 치유하는 여정이었다. 이 치유의 끝이 기억을 다시 현실로 되돌리거나 바람을 실재로 이끄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나간 것을 되살리는 게 목적이라면 결국 사람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있다. 다만 그 소중함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기억은 힘이 세지고, 모든 일상은 특별해진다

Thursday, March 23, 2017

스포트라이트 (Spotlight, 2015)

1.
Penny Wise, Pound Foolish.

마이클 레젠데스라는 기자한테 메일을 보낸 적이 있다.
당신은 탐사 보도의가치를 뭐라고 생각하는지, 나는 탐사보도가 무척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이제 더이상 어떤 회사도 그렇게 수익성없는 사업에 돈을 쓰고 싶어하지 않는다면서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투정을 부린 적이 있다. (플러스, 왜 신문사는 더이상 신입을 뽑지 않냐 라는 푸념도 했다. 세상에. 국제 진상이다.)

당시 나는 몇 개의 국내 외 언론사 시험에서 줄줄이 떨어져서 한국 뿐만 아니라 외국 언론까지 모두 다 x까라는 식의 회의론에 빠져있던 상태였다. 언론은 무슨, 다들 기레기야 라는 식의 허무론에 빠져 그냥 다시 하던 회사 일에 열심히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극장판 사람들끼리 서울극장에서 별 기대없이 이 영화를 보고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던건지 보스턴 글로브를 뒤져서 이메일을 찾았고 그날 폰으로 이메일을 써서 보냈다.

그는 (기자답지 않게) 친절하게 바로 칼답을 보냈다.
(모든 기자가 친절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모든 기자에게서 일반 독자, 혹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한테 답변하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힘든 길이고, 수익도 낮지만 결국 이런 돈을 아끼는 건 푼돈이고 그로 인해서 결국 독자라는 장기적인 고객을 잃는다고 했다. 탐사보도를 하는 것이 언론의 특징이니까 이걸 안하면 결국 제 기능을 스스로가 포기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나는 그날 다시 집에 와서 논술 퇴고를 하고 잠든 기억이 난다.


2.
톰 맥카시 감독의 <스포트라이트>는 보스톤 글로브지의 탐사보도 팀 '스포트라이트' 이야기를 다뤘다. 미국 3대 일간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신문이 겪는 것처럼 수익 만들기는 어렵고, 광고나 독자를 잃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

스포트라이트 팀이 가톨릭 보스턴 교구 사제가 성추문을 저질렀다는 제보를 받으면서 이걸 기사화하는 게 영화의 큰 틀이다. 한 줄로 거칠게 말하면 '참기자 짱짱맨'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영화는 단순하다.

우리나라에서 기자와 정치, 사회부조리를 다룬 영화들처럼 권모술수도 없고, 피바람도 불지 않는다. 우리나라 기자들이라면 저런 위험한 짓을 할 때 혼자 차가 쌩쌩 다니는 길거리를 걷지도 않을 것이며, 피자를 누가 가져다준다면 그 안의 내용물을 의심할 것이고, 기록해놓은 파일이나 기자수첩은 복제와 복제를 해서 분산시켜놓을텐데 이 영화는 그런 장면은 전혀 없다. 영화에서 마이크가 혼자 돌아다니고 자꾸 주인공들이 밤에 무방비로 있는 별것 아닌 장면에서 오히려 긴장하게 되는 건 우리나라의 이례적인 케이스에 익숙해져서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사주가 나타나 "이게 뭐하는 짓이야 당장 나가" 식의 해고도 없고, 팀원들끼리 서로 내부 정치질하는 모습도 나타나지 않았다. 새로온 편집장 마티에 대한 경계심은 있지만, 그건 뭐 어딜 가도 볼 수 있는 이방인에 대한 경계로 보고 넘어갈 정도로 미미했다.

영화에서는 피해자들의 끔찍한 모습을 보여주거나, 그 사람들이 사건을 재연하는 모습도 담기지 않았다. 우리나라같으면 아래에서 찍는 샷으로 해서 최대한 '관음적'으로 재연했을 그 모습 대신 피해자들의 현재 모습과 그 순간을 되새기며 터지는 울음만 묵묵히 담았다.

기자들도 미드 뉴스룸에서처럼 멋지게 차려입고 연설하지 않는다. 화려한 조명이 비추는 뉴스룸도 없다. 어두컴컴한 사무실에 앉아 그저 이 사건에 왜 더 빨리 눈을 기울이지 않았을까 하는 로비의 자괴감과 우리는 이런 타운에 살고 있었어 라는 맷의 공포(사건을 조사하며 자신의 애들한테 절대 *저기엔* 가선 안된다고 경고를 한다.) 정도가 영화의 변주다.

선배의 조리돌림도 없고, 국장의 쪼이기도 없다. 그냥 묵묵히 하나의 '진실'만을 찾는 기자들의 모습만 보인다. 2001년이다보니 기자들은 수첩을 들고 직접 도서관의 인명부를 줄쳐가며 조사를 한다. 소셜미디어? 인터넷 창 움직이는 걸 봐도 *속도감*이 넘친다.


3.
탈진실의 시대다. 진실도 아니지만 거짓말은 아니었으니 됐다는 모순형용이 대통령의 입에서 나오는 시대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의 역할은 애매모호하다. 사람들은 더이상 언론을 믿지 않는다. 자극적인 탈진실에 눈길이 더 가다보니 수익원도 불분명해졌다. 소셜미디어다 1인미디어다 뭐다 하면서 정보에 대한 독점지배권도 사라진 지 오래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사는 짧은 단타 수익에 빠지거나 (일명 기레기, 특종, 단독 저널리즘) 아니면 정파 저널리즘에 빠지거나 (NYT) 혹은 사라지기 일쑤다. 영국에서 좋아하던 인디는 이제 더이상 종이신문을 내지 않고, 라이프지는 2007년 사라졌다.

며칠 전 (아이러니컬하게 제3의 언론인) 네이버에서 무료 영화로 이 영화가 풀리면서 다시 봤다. 여전히 좋았고, 네이버에 뜬 뉴스를 흘끗흘끗 보면서 영화를 보니 처음 봤던 때보다 더 슬펐다. 영화에서도 결국 사회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교구장은 다시 승진을 했고, 피해자들은 여전히 트라우마가 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언론 보도로 조금 나아갈 듯 하면 결국 빵빵 하나씩 터지고, 상상의 범주를 넘은 기괴한 일들이 기괴한 제목을 달고 매일 나온다. 나는 헌재 재판관 내정자가 왜 흙수저로 기사화되는지 모르겠고, 용의녀라는 단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여전히 MSG맛 가득한 기사들 사이에서 뭔가 하나를 찾기 위해 계속 읽지만 찾기가 어렵다.

이제는 더 이상 언론에 무언가를 기대하고 읽지는 않는다. 그냥 습관이라서 읽고 읽지 않으면 어색해서 읽는다. 사람은 언젠가는 변하니까 내 습관도 곧 변할 지 모른다. 그렇지만 나같은 Pound를 위해서 Penny를 쓸 수 있는 언론사들이 남아 내가 이 오래된 습관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4.
쓰고나서 포털 뉴스를 보는데 여기가 무간지옥이구나 싶다.


5.
마티 바론은 WP에 갔다. 마이크는 여전히 보스턴에 남아서 열심히 글을 쓴다. 아마존을 업은 WP의 화려함을 따라잡을 수는 없지만, 기사 자체는 보스턴 글로브가 더 재밌다. 미국 가게 되면 종이신문으로도 사서 읽고 싶다. (전자화 되기 전에 미국가겠단 소리다.)

Monday, March 20, 2017

小幸運

1.
이제 출장이 다 끝났다. 싱가포르, 공항들, 그리고 홍콩까지 왔다갔다하면서 몇 번의 리젝션 문자와 쓴 술을 비웠고, 몇 번의 회식과 술자리를 거치니 3월도 거의 끝나간다.


2.
2010년 8월, 홍콩 카오룽통 캠퍼스에서 이 친구들을 만난 건 우주의 기적같은 일이었다.

나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했다. 점수는 있었지만 어떻게 말하는 지 몰랐고, 플랫한 사운드였다. 그리고 나는 표정이 없었다. 티미드한 아시안 걸의 전형적인 모습이 나였다. 이주현.

땀이 삐질삐질 나는 카오룽통 캠퍼스 거리에서 뭔가 말을 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외국 애들의 제스처에 나도 모르게 기가 죽었다. 교환학생 모임에서 뒤로 쳐졌다. 음식도 가리는데 첫날 먹은 음식이 KLC의 태국 생새우 요리였다. 집에도 가고 싶었고, 모든 게 다 싫었다. 나는 피곤한데 자꾸 디저트를 먹으러 (그놈의 망고푸딩) 새벽까지 그 더운 거리에서 망고푸딩을 (맥주도 아니고) 먹으면서 못 알아듣는 영어 대화에 희미하게 미소만 지어야 했다. 온지 일주일만에 유일하게 나한테서만 베드버그가 나와서 온몸이 가려워서 집에 가겠다고 스물셋의 나이에(거기 나이로는 스물둘) 엉엉 울며 집으로 전화를 했다. 홍콩 영화에서 본 푸르스름하던 홍콩의 모습은 그냥 곰팡이 냄새가 나는 퀴퀴한 더러운 도시였다.

만약 친구들이 없었다면 나는 이마리가 아닌 이주현으로 그저 그렇게 지내다 학기 중간에 그냥 돌아왔을 지 모른다. 아니 그랬을 것 같다.


3.
윙은 케이팝을 좋아했다. 정확히 말하면 빅뱅과 비스트를 좋아했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게 그렇게 고마운 적이 없을 정도로, 한국인이라고 하니까 이러저러한 케이팝 얘기를 했다. 그리고 윙은 친절하게 내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를 기다려줬고, 자기가 알고 있는 친구 에미를 소개해줬다. 그 옆에 서있던 애거스와 함께 우리는 한 모임이 됐다.

브리티쉬 본 차이니즈, 홍콩 출신인 윙을 알게 돼서 모든 게 편해졌다. 음식을 직접 주문하지 않아도 윙은 내가 먹는 걸 귀신같이 잘 알아채 주문해줬다. 혼자 밥을 못먹어서 밥을 굷거나 징징대기 일쑤였던 나한테 어디 나갈까 하고 물어봐줬다. 내가 그때 얼만큼 진상이었냐면 아침도 혼자 먹기 싫다고 윙 기숙사방에 가서 (8층이었나....) 문 두드린 적도 있었다. 아침잠 많은 윙한테 아침 먹자고 징징댄 걸 생각하면 참 개진상이다.

쇼핑을 좋아하는 윙이랑 친해진 덕분에 한 학기동안 거의 매일매일 쇼핑을 다녔다. 그때 처음 내 옷 취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고, 머리를 기르고 묶고, 힐을 신고 뛰는 것도 그때 익숙해졌다. 내 어설픈 요리를 좋아해준 윙 덕분에 지나고 나서도 요리에 취미를 붙였다. 맨체스터에서 내가 해준 야매 한식에 항상 쏘 나이스하다고 하더니, 우리집 와서는 엄마가 해준 달걀 프라이가 제일 맛있다고, 꼭 그거 다시 먹고 싶다고 그러더라.

양수오에서 장이 꼬여 쓰러졌을 때는 윙이 우리 집에 전화해준 덕분에 부모님은 딸내미가 이역만리 중국땅의 병원에서 링거맞고 울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고, 그 일을 여전히 우려먹으며 내 생명을 살려줬다고 으쓱댄다. (물론 정말 고맙다만 이제 그만 좀 하자.)

윙이 아니었다면 맨체스터로 다시 갈 일도 없었을테고, 아마 그랬다면 내 삶은 많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지금도 영국을 다녀온 걸 후회하다가 또 만족하다가 오락가락 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이렇게 만날 수 있는 건 그만큼 함께 붙어 지낸 시간이 많아서일지 모른다. 내가 영어로 밥벌이는 할 수 있게 된 것도, 이제 홍콩 요리를 한식보다 더 좋아하게 된 것도 다 윙이랑 같이 지낸 시간이 만든 변화였다.

물론 같이 살다보니 (내 잘못이 컸지만) 윙이랑 부딪히는 경우도 많았고, 한 1년 정도는 거의 연락을 안하고 지냈다. 근데 지금 생각하면 내가 너무 어렸고 철이 없었고 거의 다 내 잘못이었다. 내 위생관념이 아니라 거의 결벽에 가까운 진상짓이었고. 지난 겨울에 집에 놀러왔을때도 짜증 많이 냈는데 미안하네.

이번 출장 때 홍콩 친구랑 일요일에 배드민턴 쳤다고 하니까 지인은 "홍콩에 집있냐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나는 집은 없지만, 집처럼 의지할 친구 아니 그 이상의 시스터후드가 홍콩에 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


4.
존이랑 친해진 건 진짜로 미라클 오브 미라클, 우주의 기적이다.

교환학생들 오티 모임에서 레인보우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자리가 있었다. 그때 내 테이블 대각선 앞에 앉아있던 존은 카이시라는 저장성 출신 애랑 앉아있었다. (나는 이 둘이 베프인 줄 알았는데 이날 처음 만났다고) 나는 무슨 말을 할 지도 몰랐고, 사실 존도 표정이 가만히 있으면 엄청 쎄-한 편이라 그냥 조용히 밥만 먹고 옆 테이블에 있던 친한 교환학생 모임 애들이랑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초반에 얘도 좀 빻은 질문 (ie. 한국사람들은 진짜 공자를 니네 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하냐.. 왜 너네는 중국꺼를 다 가져가려고 하냐, 천안문 사태는 미국의 조작 아닐까 등등)을 많이 해서 "난 얘랑은 절대 친해질 수 없을 거다"라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역시 네버 세이 네버.

가을 학기 끝나고 다들 집으로 돌아갔을 때 매일 나한테 전화를 해준 건 존이었고, 매일 저녁 밥을 같이 제일 많이 먹은 건 존이었다. 전공이 비슷하다보니 수업도 학기마다 세네개는 같이 듣고 그룹 워크도 같이 했다. 나는 수업을 많이 째는 편이었고 존은 수업 예습을 많이 하는, 완전 다른 트랙에 서있는 스타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수업 째고 놀자고 진상을 많이 부렸던 것 같다. 같이 미술관도 가고, 시위도 가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첫날의 다짐과는 달리 매일 연락하던 친구가 됐다.

아직도 기억나는게 5월 22일, 그러니까 존이 돌아가는 날 기숙사 캔틴에서 다같이 밥 먹다가 내가 너무 울어서 카레가 넘쳤다. 윙도 아니고 로라도 아니고 존이 하루 먼저 간다는 소식에 너무 놀라서 펑펑 울었다. 주하이에서 온 부모님이랑 같이 돌아가는 존을 보면서 기숙사 앞에서 세상 무너지는 듯 울었고 그날 방안에 들어가서도 내내 울었다. 분명 다시 볼 수 있는 거리인데 왜 나는 다시 못 볼거라고 생각했던걸까. 중국까지 고작 해봐야 두 시간인데. 그때는 누구랑 헤어지는 게 무서웠고 끝을 보는 게 너무 버거워서 할 수 있는 건 우는 일밖에 없었다.

밤에 호텔에서 다시 돌아온 존이랑 룸메였던 레이몬드, 우리 모임 페이슨 나 이렇게 넷이서 마지막날 밤 술을 마셨다. (이 멤버에 로라, 윙, 에미까지 더해서 우리는 아직도 단체 위챗방에서 여전히 헛소리를 한다.)

돌아와서 디비알 인턴을 하는 내내 매일 사무실에서 스카이프를 했고 대학원 얘기, 취업 얘기,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그리고 기적처럼 내가 영국 가기 1주일 전에 영국 근처의 쉐필드에서 존은 석사를 했다. 존이 있던 덕분에 윙이랑 싸우고 맨체스터가 싫어진 날에는 존이랑 만나서 리버풀도 가고, 한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했던 2013년 내 생일 즈음에는 존이랑 내 인생영화인 위대한 개츠비를 보고 밥을 먹었다. 그러다가 일을 하게 돼서 좀 더 영국에 남게 됐고, 런던에서 내려갔을 때도 거기서 인턴하고 있던 존을 만나고, 피같은 오프를 내서 존 졸업식에도 다녀왔다.

지금도 존은 참 착하고 좋은 친구다. 매년 만날 때마다 배울 게 있는 친구고, 그 친구를 볼 때마다 나는 왜 이렇게 쓰레기처럼 놀기만 했을까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5.
친구들에 대해서 쓰고 싶은 말은 더 많은데 이렇게밖에 말하지 못하는 게 참 답답하다.

다녀오고 나서 허한 마음이 더 드는 건 나는 그대로인데 친구들은 더 나아간 모습을 봐서 인것 같다. 내 마음은 여전히 카오룽통 워털루 로드에서 떠들던 그 때 그대로인데, 거기에 남은 건 나밖에 없는 느낌이다.

앞으로 1년, 3년, 10년 후 우리 모습은 어떻게 될까.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은 이제 하고 싶지 않은데.... 다녀오고 나서 자꾸 후회와 그리움만 남는다.


6.

친구들한테 이렇게 고마워하는 걸 보니 이제 철이 든 걸까 아니면 그냥 이것도 잡생각인가..

가까이 있을 땐 보이지 않던 게 참 많은 것 같다. 그때 기억도 지나고 나니까 좋은 것만 다 남는다. 빨리 다시 볼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