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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January 30, 2019

Wear Sunscreen

이제 우리는 꺾였잖아.

이 말을 제일 많이 한 건 우습게도 대학교 2학년때였다.
1학년이 아닌 이상, 게다가 재수로 들어왔으니 나는 꺾인 게 아니라 거의 바닥을 뚫고 들어갈 체력과 피부와 건강상태라고 그때는 생각했다.

술을 마실 때도 우린 꺾였어, 밥을 먹어도 우린 꺾였어.

무언가를 하는데 머쓱하는 순간 '난 꺾였어' 이 말로 어색함을 무마하던 그 모습이 지금 생각해보면 참 이상하기도 하다. 

그렇게 나이에 얽매이게 된 순간부터 나는 항상 모든 순간이 어색했던 것 같다. 
남들보다 고작 한 학기 정도 늦은 3학년 2학기에 교환학생을 갔을 때도
"내 나이에 어떻게"

졸업을 미루고 영국으로 갔을 때도
"이제 내 나이가 이런데"

하면서 모든 순간에 나이를 방패삼아 내 스스로를 항상 80%정도의 존재로만 만들었던 것 같다. 나는 나이가 있으니까, 혹은 나는 나이가 많으니까 하면서. 그걸 핑계삼아 나는 약간씩 뒤로 빠졌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이 마치 나이의 미덕인 거 마냥 몸을 사렸다.



어느 순간 그런 것에 무뎌졌다. 내 또래집단과 멀어지고 나니까 초월하게 되었다고 보는 게 더 적확할지 모르겠다. 그냥 체력은 마음 먹으면 20km를 뛸 수 있는 정도? 상대적 기분이 아니라 뭔가 실제적인 현재의 지표를 가지고 생각하기로 했다. 

Your choices are half chance. So are everybody else's.

Enjoy your body. Use it every way you can. Don't be afraid of it or of what other people think of it. It's the greatest instrument you'll ever own.
Do one thing every day that scares you.
Do not read beauty magazines. They will only make you feel ugly.

Accept certain inalienable truths: Prices will rise. Politicians will philander. You, too, will get old. And when you do, you'll fantasize that when you were young, prices were reasonable, politicians were noble and children respected their elders.
https://www.chicagotribune.com/news/columnists/chi-schmich-sunscreen-column-column.html


한동안 여행자의 마음으로 살 때는 가방 하나에 물건 있으면 되겠지 하고 가볍게 살았다.
그게 다시 일년이 지나고 이년이 되고, 다시 뿌리내리기로 마음먹으면서 갑자기 한 짐이 되고 방 한가득 차기 시작했다. 

아직은 잃을 게 없으니까, 이런 말을 많이 했다. 그러면 잃을게 많아지면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는걸까. 지금 생각해봐도 그렇다. 잃을 것이 과연 내가 이렇게 두려워하면서 전전긍긍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 다시 생각해보면 잘 모르겠다.

가장 잃을까봐 두려워야 할 것은 나 자신인데 그걸 너무 오래 잊고 살았다.





Tuesday, January 8, 2019

2019

2019년이 왔지만, 새로운 해가 온 게 별 의미가 없다. 
그저 유학을 가는 해가 왔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냥 똑같은 하루다.

뭐 특별한 계획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여행가서 좀 생각해본 것들이라면


근력운동 매일 15분씩
허리 스트레칭 매일 아침
커피 하루 네 잔 이하
회사에서 물 1잔 이상 마시기
점심시간에 15분 걷기


결국 다 건강이다.
나 자신이 더 단단해질 수 있는 것들로.

앞으로 어떻게 살 지는 그 때 가서 생각하면 되겠지.
생각해보면 계획대로 된 것보다 계획을 항상 한 끗씩 벗어나는 삶이었고,
그 삶들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책을 몇 권 읽고, 뭘 더 공부하고 언어를 하나 더 하면 뭐 좋겠지만,
나한테는 결국 내가 최고인것 같다.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 수 있는 것들. 

Friday, October 19, 2018

근황

1.
블로그는 거의 버려뒀는데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올해 2q정도에 글자 보기 싫어서 네이버나 다른 쪽 연결도 다 끊어버렸다. 
책은 거의 읽지 않았고, 신문도 오늘의 운세를 위주로 그 앞뒤 페이지, 좋아하는 칼럼만 읽는다. (서울신문은 금요일에 3일치 오늘의 운세를 올려줘서 열심히 보고 있다. )

다이어리는 여전히 쓰고 있지만, 대부분 할 일이나 한 일, 돈 쓴 거, 아니면 그 순간의 분노를 담은  엿가락만 담겨있어서 조금 시간을 보낸 후 정리를 하는 과정이 나한테 필요하다.


2.
2잡 아니 3잡을 하면서 힘은 들고 (빠지는 게 맞겠지만) 살이 붙어서 몸이 안 좋다. 
출퇴근이 이렇게 몸에 해롭다는 걸 왜 몰랐을까. 
그리고 그걸 알면서도 나는 왜 한다고 나대는 것이며, 
지금도 왜 나서서 또 프리 일을 하겠다고 (무보수의!) 나서는 걸까.

역시 머리가 나쁘면 (aka 생각이 없으면) 몸이 힘들다.

5킬로그램, 올해 가기 전에 원상복구 할 수 있을까. 

트레이닝 시작하고 나서 근육은 더 붙었는데, 전체적으로 슬렌더를 원했던 내 바람과는 다르게 똥똥 딴딴해지는 기분이다. 가장 말랐던 허벅지에도 드디어 근육이 붙으면서 스키니를 입었을 때 핏이 다르다. 나는 그냥 마른 게 좋은데.....


3.
오늘은 Personal Statement를 다 썼다. 
내 삶과 동기를 이 650자에 욱여넣었다. 

경력이나 학력, 뭐 이런 건 대강 쓰겠는데 제일 힘들었던 건 왜 이 학교를 선택했냐, 앞으로 커리어 플랜은 뭐냐.

쓰면서 블로그나 구글 검색하보면 사람들은 다 거창한 이유 하나정도는 있던데 왜 나는 그게 없을까. 

사실 그냥 "런던에서 런던 프라이드 마시면서 띵까띵까 놀면서 풀밭에 누워 한량처럼 1년 쉬고 싶습니다. 앞으로의 일은 저도 모릅니다"가 가장 적합한 라인이겠지만, 이렇게 하다가는 나한테 친절하게 답해주던 교수님들일지라도, 혹은 인터내셔널을 ATM으로 보는 대학들일지라도 분명히 깔 게 보여서.

고치고 다듬어 내 삶과 아이디어의 확장, 그리고 다양성을 기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잘 꾸며댔다. 미래에 대해서는 콘텐츠 스타트업을 하겠다고...(내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가 4차 산업혁명, 스타트업, 미래, 공유, FLUID, 콘텐츠와 뉴미디어인데...)

이러고 안 가면 어쩌지 싶다만, 에라 모르겠다. 
지금 하는 일도 이거 때문에 하는 건데. 조금만 더 버텨봐야지.


4.
유럽쪽 학교는 아예 커리를 또 다르게 틀다보니 Personal Statement는 여전히 남아있다. 
이쪽으로 가게 된다면, 정말 (펀딩 안나오고 앞으로 비전도 없어보이는 학문의) 스콜라로 나가야 할 게 명백한데 왜 또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겠다고 나는......팔자에도 없는 영어 작문을 두들기면서 고통받는걸까.

이거야 말로 정신병, 도라이, 새디스트......


5.
오늘은 무조건 저녁에 운동을 갈 거다.
가서 근육운동 해야지. 
그러면 근육통 오겠지. 

역시 새디스트........ㅡㅡ

Wednesday, May 9, 2018

Resume

한동안 글이랑 관련된 건 쳐다보기도 싫어서 블로그도 끄고, 영화관에도 잘 안갔다. 책은 아마 열 권 읽었나?

며칠 전에 어세스먼트 하면서 뭔가 다시 치열하게 하다보니까 웃음이 나더라. 나는 치열하게 밤새고 일하는 거 좋아하는 전근대적 (꼰대)사람인데, 갑자기 너무나 여유로운 현대인이 되어버리니 더 그랬던 건지도 모르겠다.


다시 시작.
뭐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Friday, December 22, 2017

Year End 2017

1.
아홉수, 삼재, 뭐 아무 것도 없었고 서른 되는 거? 우습다고 생각하다 10, 11월에 엉망진창이 됐다. 너무 힘들어서 이때만큼 힘들었던 때는 아마 다신 없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지만 삶은 또 어떻게 될 지 이제 모르니 이것보다 더 힘들면 하..)

마치 5월 우승하고 모든 걸 씹어먹을 것 같았지만 이빨 몇 개가 나가버린 (코스타!) 첼시마냥. 그래도 첼시는 우승이라도 했는데 나는 뭐...........하

작년의 마무리는 '그래도 모든 것에 감사하고, 그래도 나는 행복하다' 였는데 지금은 다 필요없고 제발 지나가라. This too shall pass 이 마음으로 버틴다.

내 의지대로 흘러간 게 없어서 그런지 올해는 내가 뭔데? 나 자신의 한계를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내려놓다 한 해가 끝났다.


2.
영화는 많이 봤는데 기억에 남는 한국 영화는 정말 없다. 매년 하는 말인데 올해는 더 심각할 정도.

한국 다양성 영화는 많이 안 봤고, 상업 영화는 일하면서 다 챙겨봤다. 택시운전사만큼이나 남한산성이 좋았다.

재개봉 열풍에 맞춰서 오래된 영화를 많이 봤다. 영화를 보면서 영화 그 자체도 좋았지만, 지금 말고 저 시기에 태어났더라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계속 했다. 다시 태어나면 역시 1990년대 미국의 뉴욕이나 버블 시대 일본 도쿄가 최고다. 영화에 쓰인 돈이나 저렇게 하찮은 데까지 신경 쓰면서 사나? 싶을 정도로 사람들이 다양하게 여유롭다.


3.
홍콩 두 번, 싱가포르 한 번, 그리고 타이페이를 다녀왔다. 아시아에만 머무르니 아쉽다. 특히 4년 만에 파리를 안 가고 한 해를 보냈다. 보고 싶은 전시가 많았는데, 5월에 그냥 다녀올 걸 그랬나.


4.
Sum (기억에 남는 것들만)


렌즈와 안경 (시력이 점점 다 안 좋아지고, 전시회 가서 그림 라인이 뿌옇게 보이거나 영화 화면 색감이 잘 안 보이는 게 느껴져서 바로 했다. 렌즈를 끼고 나니까 세상이 밝고 눈부시다. 진작 쓸 걸)
아이폰 (넥서스 세 대 쓸 정도로 안빠로 살다가 드디어 사과를 들었다. 삶의 질을 올리다가도 떨어뜨리는 이상한 기계다. 아직도 작동법은 잘 모르겠는데 아이드랍이랑 애플뮤직이 좋아서 70퍼센트 정도 만족 중. 돈까지 내고 쓰는 아이클라우드 접속법을 아직도 모른다)
체지방 감량 (몸무게는 그대론데 근력 운동을 좀 챙겼더니 체지방이 22-3 정도로 맞춰졌다. 몸이 가벼워진 느낌은 좋은데 조금만 과식하거나 운동을 빼 먹으면 몸이 무거워지는 게 느껴져서 오히려 더 예민해진 느낌. 수치는 낮은데 복부에만 몰려서 똔똔인가 싶기도 하다.)
타투 (좋아하는 영화랑 인생의 교훈을 새겼다. 라고 심각하게 말하지만 목 뒤에 해서 벌써 했다는 걸 까먹는다. 안 아픈 건 아니고 아픈데 또 하고 나니까 또 할 수 있을 정도의 아픔이니 그렇게 안 아픈건가? 근데 컬러넣고 크게 하면 비교할 수 없다고 하니 고민이다. 예약상담은 하나 더 받고 있는데 과연 내년에 어떻게 될지)

여행
9월 타이페이 (인생의 행복이 이건가 싶었음 18일 맥주가 htc보다 위대하다)
10월 홍콩 (이때 카오룽베이에서 물에 뛰어들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지금은 카드값 할부가 나를 힘들게 한다.)


힐빌리의 노래 (통계 지표로 객관화되지 않는 삶)
냉정한 이타주의자 (감성보단 효율을 생각하고 일할 것)
The Road to Wigan Pier (차분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도덕적 우월감에 빠지지 않는 자세)

영화
Paterson (권태에 빠진 삶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법)
End of Summer (기쿠지로의 여름을 좀 더 귀엽게. 중국식 Coming of age?)
A Brighter Summer Day (처음은 위험하다. 비정성시보다 훨씬 더 좋았다.)
Ann Hui (홍콩을 중심으로 찍은 영화들은 다 좋다. 보통사람의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하는 게 더 좋은데 Our Times는 좀 실망했다. 물론 여기서도 나온 주인공들이 쑨옛산이나 아니면 창카이섹같은 거대한 영웅은 아니지 않냐, 할 수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국가주의는 불편하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 홍상수 영화는 '너무 좋다')

기타
Cold Brew (올 여름 맥주보다 많이 마셨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희석해서 물드와인보다 많이 마시고 있다. 텁텁하지 않아서 자꾸 넘어가다 보니 카페인 쇼크도 가끔 오는 게 함정)
bar Tilt (같은 곳 자주 안 가는데 하반기에 네 번 넘게 갔다. 단 칵테일 마시면서 쓰디 쓴 인생도 견뎌봐야지)
Runday (뛰는 걸 재밌게 규칙적으로 만들어줬다. 부산 출장에서도 했고, 홍콩 가서도 행오버에 죽어가면서도 뛰었다. 빨리 날이 좀 풀려서 밖에서 다시 뛰고 싶다.)
요가 (발레보다 조금 더 잘 맞는다. 발레는 리듬을 타야 하는데 이건 내 호흡에 맞추면 돼서 내 컨디션을 확인하는데도 좋다)
Coldplay Seoul (영상으로 볼 때는 크리스 마틴 저거 왜 저렇게 모지리처럼 흐느적대? 했는데 실제로 보니까 내가 노래 따라 부르면서 그러고 있더라)
apple Music (멜론이나 지니 같은데 없는 해외 음반이 많아서 좋다. 음질도 좋다.)
Netflix (잠은 안 오고 남들은 다 자는 시간에 혼자 우울해지려는 찰나 유일한 친구, 다음달에는 프리미엄으로 업그레이드 할 예정)
하프마라톤 (화장실만 안 갔어도 2시간 10분 끊을 수 있었는데 아쉽다. 내년에는 하프, 풀타임 둘 다 도전할 거다.)


5.
올해 알게 된 내 취향과 호불호, 나를 힘들게 하는 것과 나를 기쁘게 하는 것
(+)
재개봉에서 발견한 좋은 영화, 영화제에서 본 좋은 영화와 gv
맛있는 싱글 드립 커피 (산미는 적게)
여름밤
쨍하고 더운 날씨 (타이페이 갔을 때 날씨가 제일 좋았다)
긴 소매 블라우스와 무릎보다 살짝 짧은 쇼츠
나이키 운동화 (이제 컨버스 신으면 좀 힘들다)
딥그린
코코넛, 바닐라향 바디로션

(-)
추운 날씨
겨울밤
(온도변화에 따라 나타나는) 피부 알러지
두피염
(힙하고 다 아는 것처럼 써 놓은) 재미없는 칼럼들
배부른 느낌
쓸데없이 보내야 하는 이메일 재촉
er과 ize로 가득찬 번역들
물향나는 향수들 (조 말론)


6.
내년부터 쓸 다른 개인 계정을 만드느라 좋아하는 장르에 대해 설명하려고 정리하다 보니

우디 앨런, 기타노 다케시, 클린트 이스트우드, Frat Pack
조지 오웰, 다자이 오사무, 김훈, 어니스트 헤밍웨이, 루쉰
빈센트 반 고흐, 파블로 피카소, 헨리 마티스, 폴 고갱, 파울 클레,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진하고 선명한 걸 좋아하고 젠 체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하고, 그리고 영화는 1990년대 영화가 제일 좋다. 공터에서가 그렇게 난리가 났어도 나는 여전히 김훈이 좋다.


7.
내년에는 큰 욕심이 없다. 그냥 지금 준비하는 것만 잘 정리되면 좋겠고, 따뜻한 나라에서 더 많이 머무르고 싶다. 전시를 좀 더 많이 볼 수 있게 여행을 많이 갈 계획이고 나이키 하프랑 풀타임 한 번 뛰는 게 목표.

올해 남은 일주일은 아무런 사고 없이 조심조심 잘 넘어가면 좋겠다.

Sunday, August 20, 2017

천수위의 낮과 밤 (天水圍的日與夜, The Way We Are, 2008)

1.
천수위라고 하니까 어디지 했는데 한자를 읽어보니 아 틴수이와이~

위엔롱에서 쫌 더 올라가면 있던 습지 공원 있는 동네라는 기억밖에 안난다. 사실 가보지도 않았다. 고작 1년 채 안되는 기간에 홍콩의 모든 동네를 다 돌아볼 수도 없고, 홍콩에서 그렇게 중요한? 곳은 아니라 가볼 일도 딱히 없다.

서울을 아무리 살아도 저기 중랑천을 걸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테고, 은평구 끝자락이나 금천구 끝자락을 안가본 사람도 있을테니까.

뉴 테리토리는 딱 그런 동네였다. 중국 넘어가기 전 지나가는 동네,  "중국에서 홍콩으로 넘어온 이민자 공용 주택이 밀집한 지역"이라고 설명돼 있고, 레드 하우스가 아니었다면 나도 굳이 찾아가진 않았을 동네다.

2.
천수위의 낮과 밤은 이상적인 홍콩 로컬의 모습을 보여준다.
홍콩하면 금융 허브, 외국인이 더 많은 곳, 국제 도시거나 아니면 침사추이 미라도-청킹처럼 보이는 아주 오래된 도시 이미지로 양분된다.

그런데 여기도 사람사는데라 이렇게 극단적이기보다는 중간의 쩜오같은 공간과 사람들이 더 많다. 로컬하면 생각하는 오래됨과 도시 하면 생각하는 화려함으로 양분하기 보다는 그냥 그 중간에서 보통 사람들은 먹고 자고 산다. 웡타이신이나 삼수이포로만 빠져도 생각보다 외국인 안보이고 영어가 잘 안통한다. 홍콩섬은 이런 지역이 적지만, 카오룽쪽은 올라가면 올라갈 수록 이런 동네가 흔하다.

영화가 촬영된 곳은 거의 다 틴수이와이고 주인공이 일하는 슈퍼도 시티나 m&s같은 느낌이 아니라 웰컴같다. 일본 홋카이도산 우유보다는 카오룽 우유 팔 것 같이 생긴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 영화에서 외국인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영어 이름을 쓰지 않고 캔토니즈 이름을 쓴다. 아침마다 차찬탱 딤섬을 먹는 게 아니라 비닐백에 담긴 아침을 사다가 먹고, 신문을 살 때는 꼭 파란색 티슈를 챙겨받는 사람들의 모습. 귀여운 캐릭터에 환장하고. 정말 홍콩 로컬이라면 이런 사람들 같다.

홍콩이라는 이미지에 떨어지는 장면보다는 이렇게 사람사는 곳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다보니 가장 멀리 빠진 곳은 샤틴이다. 샤틴은 뉴테리토리랑 카오룽의 경계같은 곳인데 관광객을 위한 호텔도 이 이상은 넘어가지 않는다. 뉴타운 플라자나 만불사, 이케아를 가기 위해 가는 사람이 드물게 있겠지만...

3.
기대하지 않았던 영화였는데 이번 특별전에서 두 번째로 좋았다. (제일 좋았던 영화도 역시나 허안화 감독의 심플 라이프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소박함이 구질구질함이 되지 않고, 착함이 호구가 되지 않는 시대였다. 남을 돕는 것에서 계산을 하지 않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고, 모자간에 대화가 흘러넘치지는 않았어도 적어도 서로의 말을 귀기울여 들을 수 있는 배려심이 남아있었다.

혼자 사는 할머니에게 일자리를 소개해주고 바로 일자리를 구할 수 있고 (지금 이건 기적과 같은 동화다), 이 할머니는 비싼 버섯을 선물하고 다시 고맙다며 금반지 은반지를 선물하는. 너무 착하고 고요하게 흘러가서 실제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모습이 판타지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4.
2008년까지만 해도, 그러니까 이 영화가 만들어질 즈음만 해도 세상은 이렇게까지 각박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1000유로가 한 세대를 지칭하는 단어가 될 줄은 몰랐고, 월가를 점령할 지도 몰랐다.

홍콩의 경우는 그 변화가 더 크다. 점점 더 중국의 영향력은 커지면서 뉴테리토리 슈퍼의 식료품이 다 사라지고, 집값이 폭등하고 우산을 들고 거리에 나서거나 피쉬볼을 던지면서 싸울 거라고 예상했을까? 아마 주인공 가온이 자랐다면 분명 우산을 들고 피쉬볼을 던지는 나이 또래였을텐데 착했던 그 주인공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5.
영화에서 본 착한 홍콩 사람들은 사실 홍콩에만 있는 건 아니었을거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이제 이게 변수가 아니라 상수가 된 것 같지만) 친절한 동네 가게 아주머니는 프랜차이즈 가맹비에 헉헉대는 점주, 운이 나쁘다면 그 밑에서 일하는 알바가 되었을지도 모르고.

영화가 좋았던 건 홍콩을 봐서가 아니라 (사실 내 홍콩에 대한 기억은 뉴 테리토리보다는 부자동네인 카오룽이라 조금 다르다) 따뜻했던 그 시절을 볼 수 있어서인 것 같다.

이걸 정이라고 포장하지도 않고, 극적 사건들을 만들어가며 억지 감동 감정과잉 서사도 없지만, 잔잔하게 흘러가는 러닝타임동안 착한 사람들이 착하게 살아가는 '이야기'가 좋았다.

6.
영화 제목은 원제도 마음에 들지만 영어 제목도 마음에 든다. 천수위 사람들의 낮과 밤, 그리고 우리가 사는 법. 특별할 건 없지만 낮과 밤이 흘러가면서 잔잔히 보이는 그 사람들의 모습이 제목에 잘 담겼다.


Thursday, August 10, 2017

첨밀밀 Comrades: Almost a Love Story (1996)

1.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고 피천득 선생은 썼다.

이 구절을 처음 본 건 교환학생 끝날 즈음. 돌아가는 것에 대한 불안함과 헤어지는 아쉬움때문에 매일을 나라 잃은 백성처럼 매일 술을 마셨다. 그러고 보니 나는 2011년에 이미 탈조선을 생각했던 거다.

나한테는 한 번 만난 것도 아니고, 다시 안 만나는 사이도 아니지만 항상 그리운 사람과 장소가 있다.


2.
첨밀밀을 볼 때마다 피천득 선생의 글귀가 겹쳐진다.

같은 마음이었고, 같은 장소에 있지만 자꾸 엇갈리는 둘을 볼 때마다 자꾸 "여기서 고개를 돌렸더라면", "그때 조금만 늦게 갔더라면", "그때 더 붙잡았더라면", 그런 생각을 해본다.

만약에 이교가 호출기를 받았더라면, 소군은 소정과 결혼하지 않았을거고, 이교가 대만행 배를 타지 않았더라면 멀리 떨어지는 일도 없었을 거고, 소군이 차찬탱 안에서 밖을 내다봤더라면 그 둘의 만남은 더 빨라졌을 수도 있다. 자전거를 탄 소군이 옆을 둘러봤더라면 간절히 내달리던 이교를 태워줄 수도 있었을 거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번의 엇갈림이 있었지만 만났다.
만날 사람은 만나는 거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가 막히게 극적으로 등려군 사망 방송이 나오는 가게 앞에서 만난다.

나는 이 때 여명의 표정이 제일 좋다. 살짝 떨떠름한 것 같은 표정 속에 너무 놀라지도 않고 너무 무심하지도 않게, 그냥 덤덤하게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 같은 그런 마음이 담겨 있어서 장만옥의 울 것 같은 얼굴보다 더 기억에 남는다.


4.

이 맥도날드를 같이 갔던 친구들은 지금 뭐하고 있을까. (위챗에서 방금까지도 낄낄대고 얘기했지만).

그냥 그 때 생각을 하면 '나만 이렇게 그리운가' 하는 서운함도 들고, 나만 계속 과거를 돌아보는 것 같아서 이젠 그만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5.
영화를 처음 본 건 고등학교 입학하면서  중국어를 처음 시작할 때였다. 그때는 이 영화에 캔토니즈가 섞여있고, 장만옥이나 여명이 하는 중국어 발음이 내가 나중에 배울 보통화랑은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도 몰랐다. 정말 '중알못'인 상태였지만 등려군이 대만사람이라 위에량다이비야오워'디'신이라고 배운 건 지금도 기억난다.

다시 보니까 그래도 쫌 짬이 찼다고 중국어 대사가 들린다. 캔토도 뭐라고 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드문드문 단어가 툭 귀에 박힐 때마다 그동안 주워들은 게 공으로 날아가진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도 들고.


6.
사람과의 관계가 인연인건지, 아니면 나 혼자 인연이라고 생각하고 꾸역꾸역 붙잡고 있는건지 요즘은 잘 모르겠다.

인생은 타이밍, 인연은 때, 호우는 지시절하는데, 이 관계는 도대체 어떻게 될까.


7.
첨밀밀이랑 비슷한 한국 영화는 호우시절이 최고다. 돌아오고 나서 두 영화를 같이 보면서 피천득 수필집 엄청 읽었는데.

지금도 비슷한 걸 보니 주어진 인연보다는 내 의지가 좀 더 강한건가. 

Sunday, April 2, 2017

어느날 (One Day, 2017)

1.
당연하다는 것은 사람을 무디게 한다. 공기처럼 늘 기본값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이 주는 가치와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지나치게 된다. 그러나 만약 이 당연함이 사라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갑자기 한 감각을 느낄 수 없다면, 그 감각이 세상을 인지하는데 얼마나 중요했는지 느낄 수 있고, 늘 옆에 있던 사람이 내 곁을 떠난다면 그들이 내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가졌는지 깨닫게 된다. 마지막 순간에 가장 소중해지는 것은 결국 늘 함께해온 것이다. <어느날>은 항상 당연하게 있기에 그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던 일상의 순간을 바라본다.  

2.
보험조사관 강수는 사랑하는 아내를 사고로 한순간에 잃었다. 병으로 오랜 시간 투병하던  아내가 죽었지만, 그는 힘들어하는 내색 없이 다시 업무로 복귀한다. 처남에게 뺨을 맞고, 주변 사람에게 독하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그의 슬픔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그가 오랜 시간 동안 아내를 간병하며 지쳐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슬픔을 드러내는 순간 상실감이 더 커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냉장고에서 꺼낸 김치에서 아내와의 기억이 생각나는 것처럼 그가 마주하는 모든 일상은 이제 추억의 지뢰밭이 되어 그를 괴롭힌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는 슬퍼하지 않고, 아내의 모습을 떠올리려 하지 않는다. 슬퍼한다 해도 이미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3.
시각장애인 미소는 평생을 보지 못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시각 장애를 가지고 있던 그녀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엄마도 목소리로만 기억한다. 자신을 돌봐주던 사람도 촉각으로만 기억하고, 주변의 모든 것을 시각을 제외한 감각으로만 느끼고 인지한다. 불완전하던 미소의 감각은 교통사고로 죽음과 맞닥뜨리며 완전해진다. 코마 상태에 빠져 육체와 분리된 그녀의 영혼은 다시 태어난 것처럼 눈부신 세상의 빛과 마주하게 된다. 비장애인에게는 매일 지나치기 때문에 놀랍지 않은 기차 같은 전철과 내달리는 오토바이의 모습에도 놀라워하고 기뻐하며, 불완전한 영혼으로나마 완전한 감각을 누린다. 그녀가 직접 보고싶었던 것은 살면서는 볼 수 없었던 블루하와이 색깔과 비슷한 바다일 수도 있고 영화관에서 두 눈으로 보는 영화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가 가장 보고 싶던 것은 목소리와 손끝으로만 기억하던 사랑하던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4.
벚꽃이 흩날리는 길을 처음 보고 기뻐하는 미소의 모습과, 이를 보면서 아내와의 추억을 되새기는 강수의 모습은 각각 현재의 순간과 과거의 기억으로 대비된다. 미소가 느끼는 기쁨처럼 현재의 환희는 영원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를 느끼는 미소는 완전한 삶도, 완전한 죽음도 아닌 그 사이에 놓였다. 현재의 기쁨도 영원할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미소의 상태처럼 불완전한 것이다. 시간이 더 흐르면 결국 그 순간도 과거가 되어 기억이 돼버리고, 그 기억은 희미해지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소중했던 기억은 흐려질 수는 있지만, 사라지지는 않는다. 아내를 잃은 후 함께했던 기억을 억지로 눌러놓은 강수가 행복한 순간을 떠올리는 순간, 한구석에 자리 잡았던 기억은 다시 현실이 된다. 오히려 현실에서는 피할 수 없는 삶의 무게감을 덜어내고 좋았던 감정만을 떠올리기도 한다.

5.
<어느날>은 시각장애인이 죽음에 가까워져서야 세상을 본다는 이야기에서 출발해 일상의 특별함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러나 강수와 미소라는 두 주인공 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일상적이지도, 특별해 보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일상을 재발견하던 영화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이야기를 통속적으로 바꿔버린다. 병원에서 만난 아이와 보험사기꾼의 이야기는 영화에 가장의 의무감이라는 엉뚱한 주제를 덧대 무겁게 바꿔 극의 전체 흐름을 끊는다. 주인공 캐릭터에만 더 집중해 기억과 감각이라는 두 일상적인 가치를 강조했더라면 영화의 흐름이 더 일관적이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6.

사람은 당연한 존재, 당연한 상황이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진 후에야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친 이들과 상황들이 사실은 매 순간이 특별했다는 것을 상실을 경험하고 나서야 알 수 있다. 강수와 미소의 만남은 일상의 당연함을 상실하고 상처받은 이들이 서로를 치유하는 여정이었다. 이 치유의 끝이 기억을 다시 현실로 되돌리거나 바람을 실재로 이끄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나간 것을 되살리는 게 목적이라면 결국 사람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있다. 다만 그 소중함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기억은 힘이 세지고, 모든 일상은 특별해진다

Wednesday, December 21, 2016

2016 내맘대로 어워드

작년에 이어 올해도 쭉 정리해본다. 남은 열흘간은 이제 아무 특별한 일 안만들고 술만 마시고 놀 계획.



소설 - 거짓말이다 (김탁환), 댓글부대 (장강명)
이 두 사건의 배경이 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나는 한국에 없었다. 그래서 항상 전해 듣고 간접적으로만 화를 냈다. 책을 읽으면서 사건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생각도 들고,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졌다.

사회과학- 빨래하는 페미니즘 (스테파니 스털)
올 한 해 가장 큰 수확이 있었다면 페미니즘에 대해 좀 공부한 거? 주디스 버틀러는 아직 이해할 짬이 안되는데 이 책은 그냥 생활형으로 술술 넘겨 읽었다. 물론 글쓴 사람이 백인이고, 인종이슈에 대해서는 또 다른 비판이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현실적'인 고민을 학술적으로 정리해놓은 걸 보고 나니까 내 생각도 정리가 되는 느낌.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늦게 배운 하루키가 무섭다.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게으르지 않기가 힘들다. 여기서 게을러지면 나는 한량이고 백수고 건달이 되겠지만, 이 책 (추가로 장강명씨 페이스북) 보고 규칙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려고 노력한 것 같다.

(+) 위험한 도덕주의자 (기타노 다케시), 정의에 대하여 (애덤 스미스)

영화

BOB -I, Daniel Blake 
I demand- 영국생활하면서 내가 느꼈던 무기력함을 고스란히 영화에서 느낄 수 있었다. 켄 로치가 이렇게까지 간절하게 영화에서 얘기한 적이 없었는데, 토리 장기집권이 확정되면서 사회에 대해 엄청나게 긴장한 모습이 보인다.

상반기- 탐정 홍길동
잘생긴 남자, 화려한 촬영, 쉬운 스토리. 이거면 됐지 뭘 더 바라...

하반기 -걷기왕
귀여움이 모든 걸 이긴다. 노력 결핍과 과잉에 대해 생각해볼만한 영화.

(+) 재개봉 - 굿윌헌팅, 키즈 리턴
(++) 극장판 - 코미디의 왕, 질투 (필립 가렐)

-

스페인 말라가 피카소 미술관
만나던 여자 사진을 쭉 전시해놓은 걸 보고 '한 번 살거면 이렇게 살다 죽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과 부러움이 든 공간. 바르셀로나 미술관은 파리에 비해서 특색은 떨어지고 말라가처럼 개인의 느낌이 잘 안나온 것 같아서 그냥 그랬다. 니스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도 가보고 싶다.

퐁피두 센터 파울 클레 전시회
매표소 마감 시간이 지나서 못들어갈 뻔 했는데,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했더니 살짝 들여보내줘서 겨우 본 전시. 못갔으면 파리에 체류할 생각까지 했어서 그런지 더 기쁘게 본 전시. 유머러스하고 단순한 선, 그 속에서 느껴지는 복잡한 감정들.

발레
해본 운동 중에서 제일 재밌다. 마음과 몸과의 괴리감은 어쩔 수 없지만, '잘하고 싶다'는 욕망이 든 운동은 처음이다.

뎃생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는 마음만 있었는데 다시 시작하니까 아 그림을 보는 걸 더 좋아하는 구나 하고 알게 됐다. 선택 실패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내 취향에 대해 이해하는 시간.

쉑쉑버거 - 쉑스택
이거 먹으려고 MCR-LDN 왕복한 거 생각하면 아련하다. 고기에 치즈, 버섯까지 들어갔다니 맛없을 수가 없다. 비싼 것도 모르겠다. 맛있으면 그만. 언제 또 가지?

통영 가족여행
오랜만에 가족들이랑 보낸 시간. 제일 가깝지만 제일 어려운 가족과 부딪히지 않는 법을 배워가는 중.

브렉시트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랍지 않다. 내 월급은 사라지고 세상에 대한 기대감도 사라지고 있다. 타임머신이 생겨서 올해 5월의 나에게 '브렉시트 통과돼고 트럼프는 대통령돼고 시카고 컵스는 우승한대' 이런다면 과연 나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첼시
무리뉴 감독이 돌아왔지만 그는 북쪽으로 떠났고, 콘테가 왔을 때 솔직히 음? 했다. 세리에를 많이 안봐서 믿음도 없었는데. 요즘 첼ㅅ1보는 맛에 산다. 코스타가 이렇게 변할 줄이야.
앞에서처럼 올해 5월 나한테 '브렉시트 통과돼고 트럼프는 대통령되고 시카고 컵스는 우승한대.'까지는 그냥 넘어갔겠지만 '콘테와서 코스타 인성개조함'이라고 했다면 '미친x아, 그만해라' 라고 멱살잡았을지도. 내년 5월이 기대된다.

니트
2015년에 가장 골치였던 피부 알러지가 '좋아졌다.' (알러지엔 완치가 없다.) 두 달 동안 밀가루와 술과 고기를 끊으면서 약을 먹은 덕인지, 1년간 빠지지 않고 헬스장을 두드린 덕인지, 아니면 올해 내가 마음이 좀 편해져서인지 몸이 간지러워 잠못자는 일이 줄었다. 덕분에 올해는 니트를 마음놓고 입고 있다. 더이상 면직, 면 100%의 희쭈그레한 옷을 안입어도 된다. 아직 앙고라나 너무 fluffy한 (적확한 한국어를 못찾겠다) 니트나 퍼는 못입지만 그래도 이정도 입을 수 있다는 게 다행이다. 통장이 탈탈 털리도록 예쁜 니트를 더 사야지.

인간관계
올 한해 최고 수확. 중요하고 좋은 거니까 특별히 제일 좋아하는 초록색으로 쓰는 중. 
혼자 있는 것도 별로 안좋아하지만 어울리는 건 더 못하는 편인데 올해 많이 나아진 것 같다. 혼자 있는 시간을 줄이려고 학교다닐 때보다 신촌에 더 꾸준히 나갔고, 이런저런 모임도 많이 만들었다. 여러 사람 생각도 들어보려고 나름대로 애썼고 그 덕분에 예민한 성격이 좀 유해졌다. 한 해 더 거슬러 올라가 작년 5월의 나한테 '브렉시트 통과되고 트럼프 대통령되고 시카고 컵스 우승, 코스타는 갓스타된대'에 이어서 '이주현이 먼저 나서서 매일같이 약속을 잡는대'라고 했다면 "미친x아 그만해라"를 넘어 경찰서에 신고했을지도. 그만큼 놀랍다. 1년만에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걸까? 나도 앞으로 내가 어떻게 변할지 신기하고 기대된다. 

2017년이 빨리 와도 좋고 아니어도 그만일 것 같다. 이정도면 꽤 괜찮은건가? 2017년에는 ( 한국사는 청년으로서 대한민국 성장률과 발맞춰) 올해보다 딱 2.5%만 더 자란 내가 돼 있기를. 

Monday, December 12, 2016

나, 다니엘 블레이크 (I, Daniel Blake, 2016)

1.
<I Daniel Blake>는 느낌표, 궁서체 영화다. 켄 로치 앞에 당연한 수식어가 '좌파'인만큼 형식보다는 그 메시지가 중요하다.

영화는 아무런 인트로 음악없이 까만 화면에 나레이션만 나와서 NHS와 전화하는 다니엘 블레이크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National Health Service는 우리나라의 의료보험이랑 비슷한데 이 번호가 있어야 학교도 갈 수 있고 일도 할 수 있다. 병원에 가려고 해도 이 번호가 있어야 해서 이 번호가 있어야만 영국에서 시민의 권리를 누릴 수 있다.

상담원과 통화하다 "그 대답은 이미 52쪽에서 했는데"라고 하는 말을 듣자마자 영국에 처음 도착해서 빼곡한 서류를 채우던 생각이 나서 숨이 막혔다.

당신은 전문가냐고 묻는 다니엘의 말에 "우리는 아웃소싱한 전문가입니다"라고 하는데 영국에서 전화하던 생각이 났다. 대부분은 인디언이나 파키스타니들이 콜센터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이 사람들의 영어도 제대로 된 게 아니라 뭔가 설명하려면 전화기를 잡고 몇 시간을 싸웠던 기억이다.


2.
다니엘 블레이크의 주치의는 소견상 휴직을 권한다. 하지만 NHS의 스탠다드에 따르면 다니엘 블레이크는 일을 해야만 하는 '노동자'다. 일괄적인 평가기준은 개인의 문제를 제대로 짚어내지 못한다. 시스템은 최대한의 효용성을 추구하지만 그 사이에 발생하는 간극은 결국 온전히 개인이 짊어져야 할 피해가 된다.

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하지만 일을 하면 심장에 무리가 와서 살 수 없는 이런 역설적인 상황에서도 다니엘 블레이크는 푸드 뱅크를 거부했다. 그는 시민이고 곧 일할 것이라고 믿는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3.
케이티는 말투부터 다르다. Jordy 사이에서 확연히 구별되는 말투에서 외지인이라는 게 드러난다. 실제로 이 배우는 런던 출신이고 CHELSEA 팬이다 ktbffh!!

싱글맘에다 런던의 렌트를 감당못해 노숙자 하우스 생활을 전전하다 겨우 집을 마련했다. 다시 학교에 돌아가 꿈을 찾고 싶지만 사는 건 쉽지 않다. 새로 찾은 집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고, 냉골에 음식조차 넉넉하지 않아 푸드뱅크에서 베이크드 빈을 허겁지겁 퍼먹는다. 그렇지만 자신을 돕는 다니엘에게 토마토 파스타 한 접시를 양보할 수 있는 '시민'이다.

음식은 구할 수 있지만, 여자에게 필요한 용품을 살 수는 없다. 사치재라고 할 수 없는 생리대, 데오도란트, 면도기 (영국에서 제모와 데오도란트를 안하면 미개인취급받는다)를 훔치다 잡혔다. 이것도 극사실이라고 느낀게 테스코나 세인즈버리가 아니라 그냥 동네 슈퍼마켓이었다. 정말 저소득층 동네에는 체인 샵이 잘 들어오지 않는다.

결국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지만, 그곳에서 다니엘 블레이크가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었다.

4.
다니엘 블레이크는 자신도 힘들지만 그보다 어려운 사람을 도왔다. 마지막 남긴 편지에서 그는 "나는 개도 아니고 구걸하지도 않았다. 나는 인간답게 살 권리를 요구한다"고 했다.

영국뿐만이 아니라 전세계가 각자도생의 시대다. 신자유주의는 그 이름처럼 新하지 않은 시스템이 돼버렸다. 사람들은 국가 시스템보다 개인의 능력에 의존해 생존한다.

켄 로치 영화는 몇 편을 빼놓고는 너무 주장만 가득한 것 같아서 반감도 들었다. 그럴 거면 다큐를 찍고 프로파간다를 만들고 운동을 해라. (사실 대부분 주장만 남은 영화에 갖는 생각도 이것) 그런데 이 영화에서만큼은 간절히 호소하는 것 같다. 지금 복지가 과연 사람을 돕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Humiliating 한 다음에 나락으로 밀어넣는 복지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영화에서 말한다.

펜션 수급자를 보는 시선은 크게 두 가지다. 잠시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내 돈을 좀먹는 게으름뱅이. 신자유주의는 후자를 없애고 사회를 더 빠릿하게 움직여보자는 발상에서 시작됐다.

물론 맞는 말이다. 영국에서 살 때 가장 견딜 수 없던 건 수급자들의 무기력함이었다. 안해도 죽지 않을 정도로 살 수는 있으니까 하지 않겠다던 그 사람들의 게으름과 늘어진 모습을 보면서 이 사회에서는 못살겠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그런데 모든 펜션 수급자를 다 '세금도둑'이라고 하는 순간 다니엘 블레이크같은 이들이 나타나게 된다.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 순간마저도 '게으름'으로 치부하고 왜 일하지 않냐고 몰아세우는 순간 개인의 존엄성은 사라진다. 도움이 필요한 이를 몰아세울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도와준다고 이것을 '베푼다고' 생각한다면 결국 그 누구도 돕지 못한다.


5.
영화를 보면서 영국 살던 때 생각도 나고 요즘 상황이랑도 겹치는 게 많아서 엉엉 울었다. 아마 올해 본 영화중에서 제일 많이 운 영화같다.

나는 연대라는 말을 싫어한다. 정치적 스탠스고 뭐고를 떠나서 우리나라에서는 연대가 이상하게 왜곡돼서 '대의'를 위해 개인을 억누르는 기제가 된 것 같아 '연대', '우리'라는 말을 들으면 거부반응이 먼저 든다.

하지만 기본적인 삶마저 보장되지 않는 사회라면 과연 혼자만의 힘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내 삶의 기본적 권리를 이 국가 시스템이 해줄 수 있을까.

생각이 많아지고 멍해졌다. 영국에서 느꼈던 막연함을 수십년 살아온 내 나라에서 느끼게 될 줄이아야. 

Saturday, October 29, 2016

청와대게이트

1.
우리나라에서 놀랍고 신비롭고 경악할만한 일이 터졌다. 닉슨? 베트남 게이트? 역시 막장은 한국산이 제맛이다.


2.
대통령에 관한 (놀랍고 신비하고 상상 그 이상이라 현실감이 떨어지는) 얘기들이 매일매일 경쟁하듯 나온다.

무당한테 팔렸다느니 (뭐?) 모든 행동이 다 무당이 조종했다느니 (에?) 그래서 이모양이 된거라느니 (아...하고 이제 수긍), 2012년부터 이해안돼던 모든 행동이 이번 사건을 통해 납득이 됐다.

사건 초반에 친구들이랑 얘기를 하면서 "나는 정의고 뭐고 다 떠나서 그냥 순수한 마음으로 저 사람이 왜 최순실이란 사람을 저렇게 챙기는지 그게 궁금하다. 친자매도 아니고, 박근령이나 박지만은 내팽겨친 사람이 왜 저럴까?" 라고 정말 궁금해했다. 내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난 호기심도 나온 질문에 '순수한 마음'으로 박 대통령은 답변을 공개적으로 해주셨다. 아 은혜가 하해와 같다.


3.
이번 사태를 청와대 게이트라고 쓴 건 단순히 최순실이라는 한 사람의 잘못으로 봐서는 안됀다고 봤기 때문이다.

왜?
나머지 당원이 몰랐을까? 정말? 그렇다면 접싯물에라도 코박고 죽어야 한다.

이미 기사들이나 과거 발언을 통해 최순실이라는 사람의 존재를 다 알고 있었다는 게 나타났다. 결국 박근혜는 선택된 '액받이' 얼굴마담이었을 뿐. 다 자기 잇속 챙기자고 거기에 장단 맞춰준거지.


4.
불편한 건 이 얼굴마담이 유래없이 '여자'라는 점에서 시작된다. 제1조종자도 여자. 거기에 사고친 것도 여자다. 언론보도에 보면 무식한 사이비 종교 아줌마로 최순실을 몰아가는 듯 하고, 박근혜는 멍청한 여자, 정유라는 싸가지 없는 여자애. 결국 다 문제는 여자인가? 정말로 "암탉이 울어서 나라가 망한" 일이 21세기에 일어난다고? 레알?

오늘 이재명시장은 스피치에서 "저잣거리 아녀자"한테 문제를 맡겨서 시작됐다고 했다. 왜 굳이 그렇게 성별을 들먹여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럼 그동안 머한민국 만든 장본인들은 다 여자였나?

대학 총학 성명에서도 서울대는 이화여대가 먼저 발표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선봉에 서겠다고 했다. 왜? 여자가 먼저 나가는 게 그렇게 고까운가.

성별은 중요하지 않다. 그냥 그 사람과 그 상황, 그리고 그렇게 만든 '사람'에 집중해야 문제가 해결돼지 이렇게 '여자가 정치해서' 라고 하면 결국 여성은 2등시민이다.

나는 지금 현 정권에 대해 48%의 사람들과 같은 입장에 섰지만, 여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불편하다. 저 사람들이 바라는 정의에 내가 위치할 자리는 결국 2등이라는 게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다.

조선이 식민지였을때 밑의 착취계급은 나랏님이 누구든 관심이 없었다. 여성을 이렇게 끝까지 2등으로 취급할거라면 51.6%가 계속 헤쳐먹든, 48%가 이기든 나는 2등이기때문에 무관심해질 지도 모르겠다. 왜? 위가 바뀌어도 내 삶이 바뀌는 게 없다면 굳이 힘뺄 필요가 있을까. 내 정체성에서 정치색은 바뀔 수 있겠지만, 여성이라는 조건은 바꿀 수가 없다.


5.
불편한 건 또 있다.

이번 일을 두고 사람들은 자꾸 '부끄럽다'고 말한다. 부끄러움은 자신의 행동, 자신의 과오에 대해 쓰는 표현이 아닐까. 이번 사건는 '대통령과 집권 집단'의 과오다. 거기에 대해 '분노'하거나 '화'가 난다는 건 이해가 가지만 왜 부끄러워야 하는지 모르겠다.

외신에 나와서 한국이 샤머니즘의 나라로 비춰지는 게 부끄러울 수는 있다. 근데 그게 내 정체성과 연결지어지나? 이번 사건을을 모두의 '방조'로 책임전가 하고 있는데, 왜 그러시나. 나 안뽑았고 나는 거기에 동조한 적이 없다. 나는 화가 날 뿐 부끄럽지는 않다.

자꾸 부끄럽고 창피하다고 하는 걸 보면 조승희 총격사건때 갑자기 뻑하고 튀어나와서 사죄하던 그 일이 생각난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나는 나다. 미국 애들이 트럼프가 멕시코 차별한다고 라티노한테 사과하는 일 없다. 왜 내가 대리해서 책임을 져야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런 부끄러움의 정서가 나온 건 '우리가 남이가'라는 연결정신 그러니까 그 지긋지긋한 '연'에서 나온다.

서강대 운동권 애들이 기자들을 불러제껴놓고 '선배님이 서강의 이름에 먹칠을 하다니 부끄럽습니다' 라고 성명을 냈다. 기가 찼다. 스무 살도 넘은 성인이 환갑 넘은 사람과 '대학' 하나 같이 나왔다고 '우리'가 돼고, 그 우리라는 이유로 부끄러운가? 화가 나야지. 이 사람의 잘못은 대한민국의 주권통수자가 정치적으로 과오를 저질렀다는 거다. 내가 화나는 건 의무를 다하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나의 대리인이 저런 뻘짓을 하고 다니면서 (내 부모가 내는  세금을 펑펑 써대며 사는 모습을 봐서다. 저 사람이 내 대학 선배건 옆집 사는 이웃이건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6.
지금 추잡한 드라마 하나 더 안다고 해서 이 문제의 답이 보일까. 물론 요즘 카톡방에서 '박근혜 카더라'는 꿀잼이고 그거때문에 낮에 일하기도 힘들다. 그리고 '정의로움'에 불탄 몇 사람들 보는 것도 불편하다. 당신 감정으로 판단한 대의를 전하지 말고 사건 관계로만 전하고 끝내줬으면 좋겠는데 자꾸 사족을 단다.

나는 이렇게 씹고 물고 뜯으면서 하는 게 얼마나 우리 사회를 '정의롭게' 만들어줄지 잘 모르겠다. 이런 일들을 몇 번이나 봐왔고, 결국 또 새로운 괴물이 나오지 않을까.

Sunday, September 4, 2016

Let me introduce my self

1.
며칠간 잠도 못자고 끙끙대던 일이 끝났다. 끝나고 나서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장이 꼬여 나는 엉엉 기면서 사족보행으로 집에 왔다. 집에 오자마자 홍여사 매직에 빠져들어 인류가 진화하듯 이족보행을 한데 이어 과일과 술, 밀가루를 아작내고 이 글을 쓴다. 고개까지 아작냈다면 정말 KO 됐을 것 같은데 고기가 없다.

2.
나는 굉장히 의존적인 사람이다. 혼자 있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는 걸 요 몇년간 경험으로 깨달았다. 내 프로파일에 "이찡찡투덜"이라고 있는 건 괜한게 아니다. 정말 나는 찡찡대고 투덜댄다.

3.
요즘 주변 사람들한테 어떻게 하면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을 지 모를 정도로 고맙다. 지금 굉장히 자존감도 낮고, 일도 짜증나고 (as always) 그리고 가장 문제는 i don't know what i do 이 상태로 몇 달간을 맴돌았다. 재미없는 일을 "vocation"이라는 말로 포장해가면서 꾸역꾸역 버티면서, 거기다가 하고 싶지 않은 1,2를 함께 하면서 이런 불만족은 더 커져갔다.

4.
작년에 탈락하고 나서 솔직히 고마웠다. 그 상태로 갔다 한들 나는 불행했을 게 1000000% 뻔하고, 혼자서 또 끙끙댔을 생각을 하면 현기증이 난다. (물론 나는 합격했을 확률이 0.0000000000001%에 수렴한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때문에 굉장히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기쁘다.

나이가 먹어가면 갈수록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는 힘들다. 거기다가 나처럼 '자존감 결여' or '결핍이 있는' 상태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건 대재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 이상의, 아니 상상 이상으로 감사하고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또 내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걸 깨닫는 계기가 됐다.

나의 시덥잖은 농담을 묵묵히 참아주거나, 아니면 내 변덕스러움을 그냥 무던하게 넘겨주는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어떻게 됐을지도 모른다.

이게 참 고맙고 신기한 게, 인생에 힘든 시기는 한 번에 오고 그치는 게 아니라 주기적으로 오는데 그때마다 내 변덕과 찡찡을 받아주는 사람이 계속 끊임없이 있다. 그래서 내가 이 삶에 대한 기대를 못 놓는 지 모른다.

5.
내 마음속에서 말하고 싶은 건 무한대인데 그걸 단지 "고마워"라고 말하자니 억울하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것보다 더한데. 한글이 그정도인건지 아니면 내 한국어 능력이 그정도인건지 그냥 '고맙다'라고만 말하잔니 억울하다. 난 그게 아닌데. 그 고마움을 단지 새벽에 "자니" 와 함꼐 '아재개그' (나는 이 어이없는 언어유희를 2012년부터 해왔으니, 아재랑은 거리가 멀다고 하고 싶다.)로밖에 할 수가 없다. 나는 남한테 받는데는 익숙하지만, 이걸 돌려주는데는 한없이 멍청하다. 그래도 내 철없는 감사를 받아주는 사람이 여지껏 있다는 데 나는 오늘도 감사하다.

6.
내일 술이 깨면 이걸 부끄러워할까?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어쨌든 이 사람들과 함께 한 시간이 모여 나는 내 삶을 켜켜이(히?) 쌓아갈 수 있었고, 그래서 오늘도 버텨나갈 수 있다.

7.
바람이 있다면 내가 버텨주는 만큼 그 사람들한테도 내가 '믿을만한' 무언가가 됐으면 좋겠다. 그만큼 내가 자라있고, 내가 쓸만했으면 좋겠다. 

Sunday, August 21, 2016

가성비

1.
일요일 저녁, 갑자기 실시간 검색어에 생과일 주스가 나온다. 또 쥬시나 뭐 이런 게 먹거리 엑스파일에 걸렸나 해서 방송을 찾아봤다.

문제 요지는 이거다.

1) 비위생적이다(버린 걸 재활용, 해동 관리가 제대로 안됌)
2) MSG를 넣는다 (역시 MSG=마싰고)
3) 시럽을 넣는다

1)이야 당연히 식품 관리의 문제니 관리하고 지적하는게 맞는데, 2)랑 3)은 잘 모르겠다.

3천원 가량의 돈을 내고 거기서 향이 좋은 고품격의 생과일의 맛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를 채울 가공의 뭔가가 필요하다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 즉석 생과일 주스를 잘 안먹어서 모르겠는데, 원래 과일주스를 제대로 만들려면 더 많은 양의 과일이 필요하고, 더 비싸다.
(바르셀로나 보케리아 마켓에서도 오렌지 한 무더기에 2유로지만 종이컵만한 주스 한 잔에는 3유로다.)

물론 2)와 3)의 사실을 속인 회사는 잘못했지만, 제대로 돈을 주고 소비하는 문화가 있었더라먼 저런 '사기극'은 발생하지 않았을거다.


2.
사실 얘기하려고 한 건 주스가 아니라..가성비다.

나는 가성비라는 말이 너무 싫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겠다는데는 뭐라고 안 하겠지만 내가 쓰고 먹는데 "어머 저거 저렇게 하면 더 싼데" "가성비로는 이게 최고라니까" 하면서 내 소비가 마치 흥청망청인거 마냥 말하는 게 너무 싫다. 가격을 용량으로 나누는 걸 몰라서 안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게 별로라 안하는거다.

나는 그냥 돈 더 내고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는 게 좋다. 엄청나게 돈을 잘 버는 것도 아니지만 그냥 쭉 그랬다.

"그거 모으면 1년이면 얼마고 5년이면 얼마고.."

네네네, 잘 알겠습니다만.
나는 그렇게 지금 내 현재 행복을 팔아서 부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가성비가 좋은 것과 정말 좋은 것이 같지 않기 때문에 난 좀 더 내가 좋은 걸 좇고 싶다.

물인지 보리차인지 알 수 없는 액체를 마시는 대신 제대로 크레마가 올라온 커피를 마시고 싶고, 할인 특가를 누리기 위해 줄을 서기보단 그냥 제 돈주고 편하게 먹는 게 좋다.

사회 전체가 자꾸 가성비만 따지다 보니까 다같이 낮은 수준의 소비로 평준화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며칠전에 트위터에서 본 말처럼 정말 "압도적인" 수준의 경험을 해서 한 번 기준을 제대로 잡아줄 필요가 있다. 그게 화장품이건 음식이건 술이건 간에. 그래야 좋고 나쁨의 기준이 생기고 사람의 '취향'이라는 게 생긴다.

백종원이 별로 싫진 않지만 백종원 식의 프랜차이즈에는 엄청나게 거부반응이 드는 것도 '우리는 가성비', '원가절감' '거품 뺀'다는 식으로 해서 고급 수준의 음식을 '거품'으로 매도해서다. 빽다방 커피가 싸고 그게 그거다라고 하지만 제대로 커피를 크레마 내서 하는거랑 그냥 큰 잔에다가 물붓고 언제 로스팅했을지 모를(그리고 원산지도 모를) 샷을 섞어주는 거랑은 맛이 다르다. 라떼도 순수한 우유와 샷의 맛이 아니라 정체모를 식물성 휩을 잔뜩 올려놓고 "우리는 양이 더 많아" "니네는 속아왔어"라고 하면 할 말이 없다. 이렇게 취향은 다시 퇴화된다.

원료가 같다고 하더라도, 방법이 다르면 결과가 다른데 이 과정 자체를 무시하는 게 싫다. 백종원이 그랬다는 게 아니라 백종원을 대표로 하는 그 '가성비' 족들은 대체로 "저렴이"가 "고렴이"와 별반 차이가 없다면서 모든 '전문가'들의 노력을 다 거품으로 만들어버린다.

여기에 대해 존경하는 홍여사님은 몇 년전에 비싼 화장품에 대해서 "똑같은 콩으로 만들더라도 어떻게 만들면 된장이고 어떻게 만들면 두분데... 원료 같다고 결과가 같냐"며 '비싼 건 어느 정도의 이유는 있다'고 해주셨다.

내가 좋아하는 화장품 얘기를 해보면 그것도 다르다. 텍스쳐의 차이가 효과를 좌우한다. 색조도 마찬가지. 그런데 단순히 "들어가는 원료 같고 공장 같음"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결과를 예견하는 건 앞에서 된장과 두부를 같다고 보는 거랑 마찬가진거다. 거기서 배합과 텍스처 만드는 것, 발효, 이런 등등의 과정들이 모여서 차이를 만든다.

공연도 마찬가지고 모든 게 마찬가지다. 가격이 높아지는 건 중간 마진 장난도 있겠지만, 대부분 그만큼 인풋이 있어서다. 맨유 티켓 가격이 하늘을 찔러도 사람들은 돈을 더 내고라도 최고의 경기를 보고 싶지, 싸다고 저기 저 볼튼이나 아니면 뭐 블랙풀 이런 걸 보려고 하지 않는거랑 마찬가지다.

취향에 투자하는 걸 경제적 효용성으로 따지다보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3.
앞에 나온 것들은 내 생각이니까 남한테 강요하진 않는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해서 돈을 모아서 행복하다면 그건 그 사람의 일이고, 나는 덜 모으더라도 이렇게 살고 싶고 나한테는 이게 더 맞는 방법인 것 같다.

예전에 기타노 다케시 책에서 그 어머니가 "세일할 때는 줄서지 말것"이라고 가르쳤다는데 나는 동의했다. '가성비'가 좋은 상황이 왔을 때 소비를 하게 하는 사회에 맞춰 살지 말고 자신의 필요에 의해 살라는 걸 가르친거다.


4.
그럼으로 나는 내일 내 취향을 기르기 위해 전문가가 정성껏 내려준 커피를 마셔야겠다.
7천원에 두어 시간의 행복을 살 수 있다면 기꺼이 쓰겠다. 나는 커피를 마시고 각성해서 새나라의 일꾼이 돼어 다시 일할테니까. 포드의 생산라인 못잖은 커피-일 라인은 이제 21세기의 새로운 컨베이어벨트가 돼서 사람들을 자동적으로 일하게 만든다. 일하자. 일요일이니까 일을 하고 월요일엔 또 일을 해야지.

라떼 맛있는 집이 집앞에 딱 생겼으면 좋겠다. 양은 적더라도 재료 안 아끼고 잘 내리는.



Sunday, August 7, 2016

좋은 노래

1.
음악을 막 찾아서 열심히 듣는 편은 아니다. 공연장 가는 건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고(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집에서 공연실황 제대로 켜놓고 맥주 한잔 하는 그 정도?) 음악 듣다가 폰 날치기당한 기억이 있어서 이어폰 자체를 안쓴 지가 3년이 넘었다.

한 몇년 쯤 지나서 "와씨 이런 밴드가"하고 보면 그 밴드는 해체했거나 아니면 음악을 그만하거나 아니면 완전 이상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2.
근데 늦게 안 만큼 그 집착은 세진다. 아 내가 이런 노래를 지금에서야 듣다니 하는 반성때문에 밀린 걸 보상이라도 하듯이 열심히 듣는다. 한 노래를 하루종일 한 두세달은 듣고 정말 이 노래를 다시 들으면 토할 정도로 인이 박히고 나서야 그 노래 듣는 걸 그친다.

마이언트메리 중에서 Night Blue에 꽂혔을 때가 있었다. (내가 이 노래를 알았을 때 이미 순드래곤은 토마스 쿡으로 더 많이 나왔고, 나의 *사랑* 한진영씨는 옐로 몬스터즈로 더 활발히 활동했다)

아이팟 클래식 160gb짜리를 들을 때 열심히 라디오 천국 팟캐스트를 들었던 탓도 있었는지 거기 나오는 게스트 음악은 몇 번 찾아듣고 그랬는데 그러다가 얻어걸린 Night Blue는 정말 미친듯이 들었다.

중국 여행갔을 때 하루종일 아무말도 안하고 지냈을 때 그 음악만 들었다. 정순용씨가 상해에 잠깐 갔다가 방송에 나와서 얘기하는데 나는 그때 상해였고, Night Blue를 들으면서 이 사람이 있던 공간에 내가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면서 듣고 또 들었다. 상도 받고 유명한 건 골든 글러브앨범이지만, 나는 4집 모놀로그랑 5집 night blue, 내맘같지 않던 그시절(정순용 보컬은 여기서 최고라고 생각함)가 제일 좋다.

그때 기억이 너무 강력했던건지 지금 내 이메일 주소도 myauntmary.ljh 로 돼있다. 내가 이 밴드의 공연을 찾아다닌 것도 아니고 이 밴드가 활발히 활동할 때 따라다녔던 것도 아니지만, 내 인생의 소중한 순간에 함께 한 밴드라 이메일 주소를 바꿀 수가 없다. 영어 이름이 marie라 이메일 주소 뜻이 뭐냐고 가끔 물어보는 사람도 있는데, 이 사연을 얘기하기에는 내가 너무 '덕후'같아보여서 차마 말할 수가 없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는 foster the people 의 i would do anything for you 에 꽂혀서 프라도랑 레이나 소피아를 오가면서 이 노래만 들었다. 지금도 이 노래를 들으면 스페인의 슴슴한 겨울(*실내랑 실외랑 그닥 차이 없는 살짝 낮은 온도)과 한없이 우울했던 그때 내가 떠오른다.

이런 노래가 몇 있다. 그냥 그 장소에서 인이 박힐 정도로 들어서 그 노래를 들으면 그 장소가 떠오르는 곡들. lana del ray young and beautiful은 2013년 파리에서 징그럽게 많이 들었다. 5sos의 amnesia는 시청이랑 광화문 부근에서 너무 들어서 앨범에서 아예 삭제해버렸다.


3.
정말 좋은 노래라면 사실 좀 아껴서 나눠 들어도 될텐데 하는 마음이 든다. 이렇게 금방 질려버리지 않도록.

요즘 꽂힌 노래는 run river north의 29.

29살이라는 것도 있고 오빠 백넘버가 29여서 그냥 29라는 숫자에는 애착이 가서 다른 곡보다 이 노래를 먼저 들었고, 지금 다른 곡으로 아직까지 못넘어가고 있다.

4.
음악을 듣다 보니까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어쩌다보니 여기까지 온걸까.

Friday, August 5, 2016

잘 돼야 할 영화

1.
인천상륙작전 스코어가 생각보다 괜찮다. 625 향수라고 하기엔 관객 스코어가 2030이 압도적이다. 날씨가 더워서 가성비 제일 높은 휴가로 영화관이 딱일 수도 있다. 이걸 놓고 뭐 할배들 동원했다느니 하는 소셜미디어 글 보면 좀 피곤하다.

그냥 돈 만원 주고 시간 떼우기에 제일 좋은 게 영화말고 어딨나.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그렇게 예술영화를 찾았다고 '개봉되서는 안될 영화'느니 뭐 이런 말 하는지.
사실 극장이라는 시장에서 처벌받아야할 건 유료시사회같은 꼼수 피우는 영화지, 영화에서 (도덕률의 법칙 아래에서) 무슨 내용을 만들건 그건 감독 마음이다.

나도 리암 니슨이 한국 영화 나온 게 신기해서 극장에서 다시 볼 예정. (물론 조조로.)

2.
영화를 보면서 싫어하는 말은 '이건 꼭 봐야 하는 영화', '꼭 잘돼야 하는 영화'다. 이런 영화는 결국 영화를 '정치수단'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전에 논란된 영화들을 보면 결국 PC함에 갖혀서 영화는 선동이 되고 다큐가 되고 그렇게 아무것도 안남는 영화가 허다했다. 최근 나라가 하수상해서 그런 영화가 몰아쳤는데, 사실 매우 많이 불편했다. 시나리오도 별로, 앵글도 별로, 하지만 우리는 착한 '의지'를 가지고 만들었으니 꼭 봐주세요 이런 느낌이라.

나는 영화를 보러 돈을 내고 들어가고, 그 영화가 끝나고 나서 정치적 이슈에 대해 논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건 뭐, 정치적으로 동의한다면 꼭 보러가야 함 식으로 주입된 영화라 오히려 반감이 빡.

3.
영화는 본질적으로 예술이다. A라는 주장을 A라고만 영화에서 말한다면 그냥 그건 영상 기록물밖에 안된다. 그것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은유를 쓰던가, 아니면 영상적으로 남는 거라도 하나 남겨놓던가.

"우리는 이렇습니다" 하고 우어어 소리만 질러대는 영화를 보면 아무리 좋은 뜻이라도 폭력적이라고밖에 생각이 안된다.




정치 영화라도 사람들을 선동하려면 잘 만들어야 된다.
의지의 승리를 독일 여행가서 처음 봤는데, 솔직히 이거 보고 베를린 보니까 나도 모르게 뭔가 오오 하는 게 생겼다. 이런게 진짜 무서운 거고 이런 게 제일 위험하다.

근데 뭣도 아닌 액션 영화 하나에 이건 '관제영화'다 이런 수준으로 떠드는 건 좀 창피하다. 그렇게 말하는 쪽에서 만드는 영화는 거의 PC함에 갖혀서 주장만 담은 선전물인 경우가 더 많았으니까.

4.
마이클 무어도 사실 안좋아하지만, 그래도 그 영화가 나올 때마다 꼭 챙겨보는 건 적어도 영화 문법에는 맞는 영화를 만들어서다.
무조건 사실만 나열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기승전결도 넣고, 감독이 워낙 관종이라 이번에는 또 무슨 얘기를 떠드려나 궁금한 것도 사실.

영화는 무시하고 감독만 남는 몇 '고발영화'를 볼 때마다 항상 '당신은 마이클 무어가 아닙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5.
지금 글이 엄청 날서있는데, 일하다가 일이 안되거나 일하다가 파일을 날려먹었거나, 일하다가 빡이 쳤거나 하면 그렇다.

사람은 왜 일을 하고 사는건가. (오늘의 아무말)

Friday, July 22, 2016

피부

어제와 그제 약 끝난 기념으로 신나게 먹었다.

수요일에는 구운 가슴살이 아니라 튀긴 치킨을 먹었고, 신나게 맥주를 마셨다. 목요일엔 스터디를 가면서도 신나게 빵을 먹었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또 신나게 소이밀크가 아닌 진짜 '홀밀크' (평소에도 사실 홀은 안마시는데...) 넣은 아이스 바닐라 라떼도 마셨다. 평소에 안마시던 아이스에 사이즈도 벤티로 추가 팍팍해서 막 먹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맥도날드에서 시그니쳐에 치즈 추가, 어니언 추가한 버거에 칩까지 먹었다.

그렇게 나는 잠시잠깐의 행복을 맛보고 저녁에 헬을 맞이했다.

안먹다 먹으니 온몸이 더 간지럽고 부풀고 난리가 났다. 귓속, 코구멍같이 온몸의 뚫린 부분은 다 간지럽고 접히는 부분은 다 간지러운 느낌. 정말 온몸을 다 한 번씩 사포로 밀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간지러웠다.

왜 미련하게 이걸 먹어가지곤.....이라고 약 한 달 전과 똑같은 후회를 온몸을 벅벅 긁으며 반복했다. 내가 이걸 먹으면 사람이냐, 짐승이지 하고 나는 또 다시 짐승이 됐다.

오늘 운동가서 재보니 몸무게는 1.5킬로가 늘었다.
그렇게 나는 1시간남짓의 짧은 세치 혀의 행복을 누리고 지금까지 이러고 있다.
이젠 먹지 말자.. 내가 또 먹고 이러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의 똥이다. 아...근데 왜 맛있는 건 다 몸에 안좋지?


Saturday, July 16, 2016

스트레스

1. 
어릴 때부터 성격이 욱하는 편이었다.
엄마 말로는 원하는 걸 안사주면 머리 쥐어뽑고 굴러다니는 건 예삿일이었다고 하니 그 성질이 어딜 가나 싶다. 좀 유해졌다고 해도 그 성질은 어딘가에서 자꾸 사고를 친다.

2.
중고등학교때는 위염, 장염을 달고 살았다. 조금만 스트레스 받으면 그냥 몸이 안좋다..를 넘어서 꼬인다.

그 덕분에 나는 학교에서 합법적으로 야자를 빼먹고 집에서 잘 쉬었다. 재수할때도 마찬가지. 대학에 와서는 공부로 단 한 번도 스트레스를 받아본 적이 없으므로 당연히 위염, 장염 이런 건 겪을 일이 없었다. 

3.
집에서 운동 제일 열심히 하고 (주7회), 음식도 제일 가려먹고 (라면, 레토르트 식품 안먹음, 매운 것 안먹음, 술집 안주 안먹음 등등) 하는데 잔병치레는 제일 심하다.

철마다 유행에 앞서 감기에 걸리질 않나, 먼지나 햇빛을 좀 받으면 온몸에 뭐가 난다.
(도서관에서 좀 오래된 책을 읽으면 눈물+재채기+피부 발진 쓰리 콤보라 그냥 사서 보거나 안읽는다. 이 핑계로 도서관은 잘 안가는 편.)

홍콩에 갔을 때도 첫 기억이 온몸에 알러지 반응이 돋아 울면서 "나 집에 갈래" 하고 엄마한테 진상부렸던 거다. 물론 그 이후에도 진상과 흑역사는 차곡차곡 적립해서 구이린 가는 길에 양수오에서 쓰러져서 중국 병원에도 입원도 해봤다.

영국에서도 피부가 문제가 많아서 칼라마인은 항시 가지고 다녔고, 와인을 먹으면 이상하게 반점이 생겨서 열심히 맥주를 마셨다. (이게 말이야 똥이야...)

4.
작년에 한창 공채 준비할 때는 두피가 짓무르고 온몸이 간지러워서 잠을 못잤는데, 이게 좀 시험보고 이래야 할 시즌만 되면 계속 이래서 약을 먹었다. 

비슷한 상황을 겪은 다비씨가 한약불신론을 주입해주기도 했고, 그 약사가 좀 미덥지도 않았고, 그리고 한약을 먹으니 내가 사랑하는 음식 (밀가루+유제품)을 끊어야해서 그냥 내일까지만 먹고 끝내기로 했다.

여전히 피부는 간지럽고 맥박은 토끼맥이고, 여전히 부실하다.

5.
요즘은 귓속도 붓는다. 영국에서 매니저랑 트러블 있을 때 고름이 철철 나던 거에 비하면 그래도 아직은 버틸만 하지만 귀가 자꾸 간지러우니 집중도 안되고 머리도 아프고 왠지 졸린 것 같고. 그렇다. 그때 막 벽이 내려오는 것 같고 자다가 숨막혀서 깨고 그랬는데, 아직 그 상태는 아니니 다행이기도 하고. 더 심해지기 전에 이 상황이 좀 바뀌었으면 좋겠는데.

6.
그래서 결론은 지금이 제일 힘들다. 몸도 마음도. 
이렇게 여기다가라도 나 더럽게 힘들다고 지금 털어놔야 할 것 같았다.
나만 이렇게 재미없는건가. 

7.
스트레스 관리도 능력이라는데 나는 아마 그 능력치로 따지면 70억 인구 중에서 70억등 할 것 같다. 

Sunday, July 10, 2016

Dirty

1.
이태원이나 홍대, 아니면 강남쪽에서 꽤 꾸민 (약 20대 초반) 남자들이 지나가면 열에 여덟은 러쉬 더티를 뿌린 것 같다.
잔향이 꽤 진한 데다가 거의 등산가방같은 커다란 백팩 사이드 주머니에 꽂고 다니는 것도 종종 보인다.

이렇게라도 뿌리고 다녀줘서 고맙다. 지하철 2호선에서 빈자리보다 반가운게 향수 좀 뿌리고 땀냄새 가리려고 노력한 사람들.



2.
이 향에 호불호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전적으로 호다.
부산 어느 카페에서 더티 뿌린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는 데도 있다는데. 그 글을 보면서 더티가 그정도까지인가? 하는 생각만 들었다.

러쉬의 매력은 여름밤 분위기랑 찰떡같이 잘 맞아 떨어진다는 점이다.

샌달우드에 라벤더 향이 강해서 뿌리는 순간 '영국 여름' 느낌이다. 민트향이 강하다는데 그건 첫향에만 살짝 나고 잔향은 라벤더에 샌달우드만 남는다. 뿌리면 보디 스프레이인데도 불구하고 보통 하루 이상은 간다.

영국에 있을 때 여름밤에는 무조건 방에 이거 한 번씩 뿌리고 탄산을 마시면서 일했는데 그러면 풀밭에 나온 느낌이다. 피크닉 나갈 필요 없이 이렇게 뿌리고 시원한 거 마시면서 유투브로 좋아하는 '여름'음악을 들으면 체온이 한 1도는 내려가는 것 같다.
여름음악 eg. asoto union- think about chu, havard - clean and dirty (여기도 더티가!), free tempo- immaterial white


3.
물론 이 향을 퍼부으면 역하긴 하다. 우디한 향이 진해지면서 파우더리해질 수도 있고, 어쨌건 향은 취향을 많이 타는 거라 나한테는 가벼운 이 향이 남한테는 욱 할 정도로 무거울 수 있으니까.

하도 요즘 더티 뿌린 사람 오면 구역질 난다는 글을 많이 봐서 그런지 밖에 나갈 때는 조심스러워진다. (나는 향수는 좀 뿌린 티를 내는 편이라 내 주변 사람들도 힘들었을까.)

지금 쓰고 있는 것만 다 쓰고 다른 걸 쓸까 생각하다가도 이 영국 풀밭같은 느낌이 나는 향수를 찾을 수가 없다.

나는 첫향도 좋아하지만 잔향에서 나는 라벤더랑 우디함이 좋아서 자기 전에 보통 침대에도 뿌리고 입고 나갈 옷에도 뿌려놓고 잔다. (6월부터 9월 한정) 그러면 잘때는 시원한 느낌이어서 좋고 다음날에는 달달한 라벤더 향기만 남아서 하루가 상쾌하다.

그런데 내 주변 사람들이 다 싫어했으면 어쩌지. 지금 러쉬 더티 검색해보니까 호보다 불호가 태반인 것 같다. 도대체 왜...?

앞으로는 욕 안먹게 동네에서만 뿌려야 하나. 근데 지하철 꿉꿉한 냄새보다는 러쉬 더티가 오억배는 나은데.

4.
생각난 김에 향수 호불호 정리.

불호
제이로, 클린, 마크 제이콥스 데이지, 레인(스플래쉬), 쁘띠상봉, 아쿠아디지오, 존 바바토스 아티산, 랑방 에끌라드 아르페쥬 (를 비롯한 그 아류 향수들), 끌로에 잔느, 러브, 로, (사실 끌로에 라인 다.....) 겐조 전부.. 이세이 미야케 전부, 에르메스 쟈뎅 수르닐, 조 말론 미모사, 피오니& 블러쉬, 라임바질& 만다린, 얼그레이&큐컴버, 잉글리쉬 페어 &프리지아, 딥디크 롬브르 단 로


마크 제이콥스 우먼 (3병), 구찌 길티 (2병), 더티 (7병), 브리트니 스피어스 래디언스 (3병- 단종...), roger & gallet  Fleure de Figuier (Eau Fraiche로 3병- 지금 메인인데 한국에 안들어와서 어떻게 구할지 고민. 그나저나 이 브랜드 어떻게 읽는걸까), YSL Opium, 조 말론 넛맥& 진저, 우드 세이지 & 시솔트, 펜할리곤스 가드니아, 지조니아


생각보다 취향이 중구난방.

싫어하는 향수 쓰고 나니 러쉬 싫어하는 사람 마음이 이해간다.
새 향수 한 병 더 사고 싶다. 망할 환율. 브렉시트 망해라. 아니다. 이렇게 망해도 결국 나만 망하겠지. 그냥 망할 거 한 병 더 사서 향기롭게 지옥행 (파산행) 열차를 탈까.

Saturday, July 9, 2016

여름

4계절 중에는 여름이 제일 좋다.

돈없어 서러운 겨울, 괜히 나가야할 것 같은 가을, 생일주간이 있는 봄처럼 짜증나는 것도 없고.

여름이 좋은 이유를 100가지 대라고 하면 나는 1000사지를 댈 수도 있을만큼 여름이 좋다.

물론 장마나 태풍처럼 해가 안나는 날은 싫지만 오늘처럼 쨍하게 빛이 내리쬐면 행복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엄마한테 콧소리 섞어가면서 "일어나쏭~"하고 신나게 운동을 간다.

짙푸른 나무색도 좋고 바삭하게 잘 마른 수건에서 나는 햇빛냄새도 좋다.

새벽 한 시정도에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랑 유투브에서 옛날 노래를 흥얼이면 천국이 따로 없다

저녁 여덟 시쯤에 핑크 쿼츠 색을 한 하늘을 보면서 길맥하는 것도 좋고.

사실 요 며칠 사이에 자괴감? 내가 우주 먼지보다 작아진 느낌이라서 힘들었다. 주변에 잘하는 사람이 많은데 나는 걱정"만' 하고 있었으니 그 괴리만 커지고.

그래도 여름이라 멘탈 회복이 빨라 다행이다. 겨울이었으면 한 두 달 잠수타고 봄이었으면 다시 또 여권들고 나갔을 정도의 자괴감이었는데 어제는 맥주 댓 잔으로 끝냈다.

잘 될거야 잘 될거야 이생각은 하면서 요즘 주변 사람들한테 쓸데없는 말도 하고, 말이 많아져서 집에 와서는 다시 또 후회한다.

이제 이 여름이 끝나면 내가 웃을 수 있을까 벌써 창조적으로 걱정을 하겠지.

그래도 여름이라 행복하다. 길맥하고싶어 (기승전아무말)



Thursday, June 23, 2016

싸이코 (Psycho, 1960)

1. 지금 에서 면접을 볼 때 나의 전-전 매니저 아나 (Anna지만, 영국이니까 아나라고 읽도록)가 물었다.

"What is your weak point for this job?"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I cannot see any bloody, slash, gore, or any kind of horror movie. If I have to, or be forced to watch those kind of genre movies, I definitely will be unhappy."


다행히 우리 회사는 IFE여서 이런 장르를 선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밥벌이는 하고 산다. 가끔 호러 장르나 보기 힘든 영화를 봐야하는 경우 (ie. 손님, 곡성) 나는 그 작은 스크리닝 링크를 놓고서도 다시 눈을 가리고 낑낑대며 지나친다.


2. 극장판에서 영화를 보는데 '복수는 나의 것'에 이어 '사이코'를 보게 됐다.
'복수는 나의 것'은 보다가 한 10분도 되지 않아 나왔다. 이미 본 영화여서 오히려 안 힘들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프닝이 시작돼고나서부터 내가 힘겨워하는 그 '지점'이 떠올랐다. 

그리고 10분만에 나와서 당당히 회사 랩탑(이자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랩탑)을 켜고 일했다.

난 생각보다 겁도 많고 무서운 걸 잘 못본다.

볼드까지 쳐서 써놓는 이유는 그냥 그렇다고. 고등학교때 허세에 쩔어서 막 쏘우 이딴거 보고 그랬는데 집에 와서 맨날 불켜놓고 캐롤 부르면서 잤다. (유일하게 아는 찬송 which I refer as song of Priests')

3. 사실 사이코는 안무섭다.
워낙 그 영화 자체가 이미 하나의 '형식'으로 굳어져서 어디선가 많이 본 장면도 많고. 사운드트랙이나 효과같은 것도 익숙하다.

샤워 바스텁 안에서 꺅 소리지르는 것도, 너무 익숙한 상황이다. 오리지널리티가 이미 상실돼서 그게 그렇게 무섭냐? 이런 지점.

4. 근데도 무섭다.


이미 알고 있는 반전이라고 해도 그냥 오싹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꿈에 나올까봐서 나는 온갖 힘을 다해서 이 표정을 안보려고 애쓴다.

5. 이런 무서움의 밑바탕에는 나도 어쩌면 '개죽음'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을지 모른다. 도시괴담(장기밀매, 인신매매)부터 강남역 살인사건까지 이어져왔을 때 나는 항상 '당할 수 있는' 입장에 처했다. 

통제되지 않은 '변수'가 내 주변에 나타나서 내 생존을 위협한다는 '망상' (혹은 예측)을 항상 하고 살기 때문에 이런 영화도 허투루 지나치기가 어렵다. 

영화를 볼 때 타란티노처럼 공감이 안되는 영화는 깔깔 웃으며 지나칠 수 있지만, 블랙스완에서 손톱 뜯는 것처럼 상상할 수 있는 고통은 뼈져리게 느껴지는 거랑 비슷한 이치랄까.


6. 그래도 이 영화에서 마리온 진짜 예쁘다.
흑백 영화가 좋은 건 각 캐릭터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볼 수 있다. 블러처럼 뽀샤시가 아니라 정말 '흑과 백'이라는 이분법 안에서 오롯이 자신의 '미'를 볼 수 있는 느낌.
(같은 맥락에서 오드리 햅번 로마의 휴일, 잉그리드 버그만 영화'들'을 좋아한다)

7. 영화 올리느라 영상 다시 보는데 아..... 표정이 안잊혀.

8. 알프레드 히치콕이 영화하는 예술인이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일반인으로만 남았다면 뭔가 '잊히지 않을 무서운 일'을 할 사람이 됐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