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March 23, 2017

스포트라이트 (Spotlight, 2015)

1.
Penny Wise, Pound Foolish.

마이클 레젠데스라는 기자한테 메일을 보낸 적이 있다.
당신은 탐사 보도의가치를 뭐라고 생각하는지, 나는 탐사보도가 무척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이제 더이상 어떤 회사도 그렇게 수익성없는 사업에 돈을 쓰고 싶어하지 않는다면서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투정을 부린 적이 있다. (플러스, 왜 신문사는 더이상 신입을 뽑지 않냐 라는 푸념도 했다. 세상에. 국제 진상이다.)

당시 나는 몇 개의 국내 외 언론사 시험에서 줄줄이 떨어져서 한국 뿐만 아니라 외국 언론까지 모두 다 x까라는 식의 회의론에 빠져있던 상태였다. 언론은 무슨, 다들 기레기야 라는 식의 허무론에 빠져 그냥 다시 하던 회사 일에 열심히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극장판 사람들끼리 서울극장에서 별 기대없이 이 영화를 보고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던건지 보스턴 글로브를 뒤져서 이메일을 찾았고 그날 폰으로 이메일을 써서 보냈다.

그는 (기자답지 않게) 친절하게 바로 칼답을 보냈다.
(모든 기자가 친절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모든 기자에게서 일반 독자, 혹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한테 답변하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힘든 길이고, 수익도 낮지만 결국 이런 돈을 아끼는 건 푼돈이고 그로 인해서 결국 독자라는 장기적인 고객을 잃는다고 했다. 탐사보도를 하는 것이 언론의 특징이니까 이걸 안하면 결국 제 기능을 스스로가 포기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나는 그날 다시 집에 와서 논술 퇴고를 하고 잠든 기억이 난다.


2.
톰 맥카시 감독의 <스포트라이트>는 보스톤 글로브지의 탐사보도 팀 '스포트라이트' 이야기를 다뤘다. 미국 3대 일간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신문이 겪는 것처럼 수익 만들기는 어렵고, 광고나 독자를 잃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

스포트라이트 팀이 가톨릭 보스턴 교구 사제가 성추문을 저질렀다는 제보를 받으면서 이걸 기사화하는 게 영화의 큰 틀이다. 한 줄로 거칠게 말하면 '참기자 짱짱맨'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영화는 단순하다.

우리나라에서 기자와 정치, 사회부조리를 다룬 영화들처럼 권모술수도 없고, 피바람도 불지 않는다. 우리나라 기자들이라면 저런 위험한 짓을 할 때 혼자 차가 쌩쌩 다니는 길거리를 걷지도 않을 것이며, 피자를 누가 가져다준다면 그 안의 내용물을 의심할 것이고, 기록해놓은 파일이나 기자수첩은 복제와 복제를 해서 분산시켜놓을텐데 이 영화는 그런 장면은 전혀 없다. 영화에서 마이크가 혼자 돌아다니고 자꾸 주인공들이 밤에 무방비로 있는 별것 아닌 장면에서 오히려 긴장하게 되는 건 우리나라의 이례적인 케이스에 익숙해져서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사주가 나타나 "이게 뭐하는 짓이야 당장 나가" 식의 해고도 없고, 팀원들끼리 서로 내부 정치질하는 모습도 나타나지 않았다. 새로온 편집장 마티에 대한 경계심은 있지만, 그건 뭐 어딜 가도 볼 수 있는 이방인에 대한 경계로 보고 넘어갈 정도로 미미했다.

영화에서는 피해자들의 끔찍한 모습을 보여주거나, 그 사람들이 사건을 재연하는 모습도 담기지 않았다. 우리나라같으면 아래에서 찍는 샷으로 해서 최대한 '관음적'으로 재연했을 그 모습 대신 피해자들의 현재 모습과 그 순간을 되새기며 터지는 울음만 묵묵히 담았다.

기자들도 미드 뉴스룸에서처럼 멋지게 차려입고 연설하지 않는다. 화려한 조명이 비추는 뉴스룸도 없다. 어두컴컴한 사무실에 앉아 그저 이 사건에 왜 더 빨리 눈을 기울이지 않았을까 하는 로비의 자괴감과 우리는 이런 타운에 살고 있었어 라는 맷의 공포(사건을 조사하며 자신의 애들한테 절대 *저기엔* 가선 안된다고 경고를 한다.) 정도가 영화의 변주다.

선배의 조리돌림도 없고, 국장의 쪼이기도 없다. 그냥 묵묵히 하나의 '진실'만을 찾는 기자들의 모습만 보인다. 2001년이다보니 기자들은 수첩을 들고 직접 도서관의 인명부를 줄쳐가며 조사를 한다. 소셜미디어? 인터넷 창 움직이는 걸 봐도 *속도감*이 넘친다.


3.
탈진실의 시대다. 진실도 아니지만 거짓말은 아니었으니 됐다는 모순형용이 대통령의 입에서 나오는 시대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의 역할은 애매모호하다. 사람들은 더이상 언론을 믿지 않는다. 자극적인 탈진실에 눈길이 더 가다보니 수익원도 불분명해졌다. 소셜미디어다 1인미디어다 뭐다 하면서 정보에 대한 독점지배권도 사라진 지 오래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사는 짧은 단타 수익에 빠지거나 (일명 기레기, 특종, 단독 저널리즘) 아니면 정파 저널리즘에 빠지거나 (NYT) 혹은 사라지기 일쑤다. 영국에서 좋아하던 인디는 이제 더이상 종이신문을 내지 않고, 라이프지는 2007년 사라졌다.

며칠 전 (아이러니컬하게 제3의 언론인) 네이버에서 무료 영화로 이 영화가 풀리면서 다시 봤다. 여전히 좋았고, 네이버에 뜬 뉴스를 흘끗흘끗 보면서 영화를 보니 처음 봤던 때보다 더 슬펐다. 영화에서도 결국 사회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교구장은 다시 승진을 했고, 피해자들은 여전히 트라우마가 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언론 보도로 조금 나아갈 듯 하면 결국 빵빵 하나씩 터지고, 상상의 범주를 넘은 기괴한 일들이 기괴한 제목을 달고 매일 나온다. 나는 헌재 재판관 내정자가 왜 흙수저로 기사화되는지 모르겠고, 용의녀라는 단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여전히 MSG맛 가득한 기사들 사이에서 뭔가 하나를 찾기 위해 계속 읽지만 찾기가 어렵다.

이제는 더 이상 언론에 무언가를 기대하고 읽지는 않는다. 그냥 습관이라서 읽고 읽지 않으면 어색해서 읽는다. 사람은 언젠가는 변하니까 내 습관도 곧 변할 지 모른다. 그렇지만 나같은 Pound를 위해서 Penny를 쓸 수 있는 언론사들이 남아 내가 이 오래된 습관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4.
쓰고나서 포털 뉴스를 보는데 여기가 무간지옥이구나 싶다.


5.
마티 바론은 WP에 갔다. 마이크는 여전히 보스턴에 남아서 열심히 글을 쓴다. 아마존을 업은 WP의 화려함을 따라잡을 수는 없지만, 기사 자체는 보스턴 글로브가 더 재밌다. 미국 가게 되면 종이신문으로도 사서 읽고 싶다. (전자화 되기 전에 미국가겠단 소리다.)

Monday, March 20, 2017

小幸運

1.
이제 출장이 다 끝났다. 싱가포르, 공항들, 그리고 홍콩까지 왔다갔다하면서 몇 번의 리젝션 문자와 쓴 술을 비웠고, 몇 번의 회식과 술자리를 거치니 3월도 거의 끝나간다.


2.
2010년 8월, 홍콩 카오룽통 캠퍼스에서 이 친구들을 만난 건 우주의 기적같은 일이었다.

나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했다. 점수는 있었지만 어떻게 말하는 지 몰랐고, 플랫한 사운드였다. 그리고 나는 표정이 없었다. 티미드한 아시안 걸의 전형적인 모습이 나였다. 이주현.

땀이 삐질삐질 나는 카오룽통 캠퍼스 거리에서 뭔가 말을 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외국 애들의 제스처에 나도 모르게 기가 죽었다. 교환학생 모임에서 뒤로 쳐졌다. 음식도 가리는데 첫날 먹은 음식이 KLC의 태국 생새우 요리였다. 집에도 가고 싶었고, 모든 게 다 싫었다. 나는 피곤한데 자꾸 디저트를 먹으러 (그놈의 망고푸딩) 새벽까지 그 더운 거리에서 망고푸딩을 (맥주도 아니고) 먹으면서 못 알아듣는 영어 대화에 희미하게 미소만 지어야 했다. 온지 일주일만에 유일하게 나한테서만 베드버그가 나와서 온몸이 가려워서 집에 가겠다고 스물셋의 나이에(거기 나이로는 스물둘) 엉엉 울며 집으로 전화를 했다. 홍콩 영화에서 본 푸르스름하던 홍콩의 모습은 그냥 곰팡이 냄새가 나는 퀴퀴한 더러운 도시였다.

만약 친구들이 없었다면 나는 이마리가 아닌 이주현으로 그저 그렇게 지내다 학기 중간에 그냥 돌아왔을 지 모른다. 아니 그랬을 것 같다.


3.
윙은 케이팝을 좋아했다. 정확히 말하면 빅뱅과 비스트를 좋아했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게 그렇게 고마운 적이 없을 정도로, 한국인이라고 하니까 이러저러한 케이팝 얘기를 했다. 그리고 윙은 친절하게 내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를 기다려줬고, 자기가 알고 있는 친구 에미를 소개해줬다. 그 옆에 서있던 애거스와 함께 우리는 한 모임이 됐다.

브리티쉬 본 차이니즈, 홍콩 출신인 윙을 알게 돼서 모든 게 편해졌다. 음식을 직접 주문하지 않아도 윙은 내가 먹는 걸 귀신같이 잘 알아채 주문해줬다. 혼자 밥을 못먹어서 밥을 굷거나 징징대기 일쑤였던 나한테 어디 나갈까 하고 물어봐줬다. 내가 그때 얼만큼 진상이었냐면 아침도 혼자 먹기 싫다고 윙 기숙사방에 가서 (8층이었나....) 문 두드린 적도 있었다. 아침잠 많은 윙한테 아침 먹자고 징징댄 걸 생각하면 참 개진상이다.

쇼핑을 좋아하는 윙이랑 친해진 덕분에 한 학기동안 거의 매일매일 쇼핑을 다녔다. 그때 처음 내 옷 취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고, 머리를 기르고 묶고, 힐을 신고 뛰는 것도 그때 익숙해졌다. 내 어설픈 요리를 좋아해준 윙 덕분에 지나고 나서도 요리에 취미를 붙였다. 맨체스터에서 내가 해준 야매 한식에 항상 쏘 나이스하다고 하더니, 우리집 와서는 엄마가 해준 달걀 프라이가 제일 맛있다고, 꼭 그거 다시 먹고 싶다고 그러더라.

양수오에서 장이 꼬여 쓰러졌을 때는 윙이 우리 집에 전화해준 덕분에 부모님은 딸내미가 이역만리 중국땅의 병원에서 링거맞고 울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고, 그 일을 여전히 우려먹으며 내 생명을 살려줬다고 으쓱댄다. (물론 정말 고맙다만 이제 그만 좀 하자.)

윙이 아니었다면 맨체스터로 다시 갈 일도 없었을테고, 아마 그랬다면 내 삶은 많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지금도 영국을 다녀온 걸 후회하다가 또 만족하다가 오락가락 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이렇게 만날 수 있는 건 그만큼 함께 붙어 지낸 시간이 많아서일지 모른다. 내가 영어로 밥벌이는 할 수 있게 된 것도, 이제 홍콩 요리를 한식보다 더 좋아하게 된 것도 다 윙이랑 같이 지낸 시간이 만든 변화였다.

물론 같이 살다보니 (내 잘못이 컸지만) 윙이랑 부딪히는 경우도 많았고, 한 1년 정도는 거의 연락을 안하고 지냈다. 근데 지금 생각하면 내가 너무 어렸고 철이 없었고 거의 다 내 잘못이었다. 내 위생관념이 아니라 거의 결벽에 가까운 진상짓이었고. 지난 겨울에 집에 놀러왔을때도 짜증 많이 냈는데 미안하네.

이번 출장 때 홍콩 친구랑 일요일에 배드민턴 쳤다고 하니까 지인은 "홍콩에 집있냐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나는 집은 없지만, 집처럼 의지할 친구 아니 그 이상의 시스터후드가 홍콩에 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


4.
존이랑 친해진 건 진짜로 미라클 오브 미라클, 우주의 기적이다.

교환학생들 오티 모임에서 레인보우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자리가 있었다. 그때 내 테이블 대각선 앞에 앉아있던 존은 카이시라는 저장성 출신 애랑 앉아있었다. (나는 이 둘이 베프인 줄 알았는데 이날 처음 만났다고) 나는 무슨 말을 할 지도 몰랐고, 사실 존도 표정이 가만히 있으면 엄청 쎄-한 편이라 그냥 조용히 밥만 먹고 옆 테이블에 있던 친한 교환학생 모임 애들이랑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초반에 얘도 좀 빻은 질문 (ie. 한국사람들은 진짜 공자를 니네 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하냐.. 왜 너네는 중국꺼를 다 가져가려고 하냐, 천안문 사태는 미국의 조작 아닐까 등등)을 많이 해서 "난 얘랑은 절대 친해질 수 없을 거다"라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역시 네버 세이 네버.

가을 학기 끝나고 다들 집으로 돌아갔을 때 매일 나한테 전화를 해준 건 존이었고, 매일 저녁 밥을 같이 제일 많이 먹은 건 존이었다. 전공이 비슷하다보니 수업도 학기마다 세네개는 같이 듣고 그룹 워크도 같이 했다. 나는 수업을 많이 째는 편이었고 존은 수업 예습을 많이 하는, 완전 다른 트랙에 서있는 스타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수업 째고 놀자고 진상을 많이 부렸던 것 같다. 같이 미술관도 가고, 시위도 가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첫날의 다짐과는 달리 매일 연락하던 친구가 됐다.

아직도 기억나는게 5월 22일, 그러니까 존이 돌아가는 날 기숙사 캔틴에서 다같이 밥 먹다가 내가 너무 울어서 카레가 넘쳤다. 윙도 아니고 로라도 아니고 존이 하루 먼저 간다는 소식에 너무 놀라서 펑펑 울었다. 주하이에서 온 부모님이랑 같이 돌아가는 존을 보면서 기숙사 앞에서 세상 무너지는 듯 울었고 그날 방안에 들어가서도 내내 울었다. 분명 다시 볼 수 있는 거리인데 왜 나는 다시 못 볼거라고 생각했던걸까. 중국까지 고작 해봐야 두 시간인데. 그때는 누구랑 헤어지는 게 무서웠고 끝을 보는 게 너무 버거워서 할 수 있는 건 우는 일밖에 없었다.

밤에 호텔에서 다시 돌아온 존이랑 룸메였던 레이몬드, 우리 모임 페이슨 나 이렇게 넷이서 마지막날 밤 술을 마셨다. (이 멤버에 로라, 윙, 에미까지 더해서 우리는 아직도 단체 위챗방에서 여전히 헛소리를 한다.)

돌아와서 디비알 인턴을 하는 내내 매일 사무실에서 스카이프를 했고 대학원 얘기, 취업 얘기,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그리고 기적처럼 내가 영국 가기 1주일 전에 영국 근처의 쉐필드에서 존은 석사를 했다. 존이 있던 덕분에 윙이랑 싸우고 맨체스터가 싫어진 날에는 존이랑 만나서 리버풀도 가고, 한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했던 2013년 내 생일 즈음에는 존이랑 내 인생영화인 위대한 개츠비를 보고 밥을 먹었다. 그러다가 일을 하게 돼서 좀 더 영국에 남게 됐고, 런던에서 내려갔을 때도 거기서 인턴하고 있던 존을 만나고, 피같은 오프를 내서 존 졸업식에도 다녀왔다.

지금도 존은 참 착하고 좋은 친구다. 매년 만날 때마다 배울 게 있는 친구고, 그 친구를 볼 때마다 나는 왜 이렇게 쓰레기처럼 놀기만 했을까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5.
친구들에 대해서 쓰고 싶은 말은 더 많은데 이렇게밖에 말하지 못하는 게 참 답답하다.

다녀오고 나서 허한 마음이 더 드는 건 나는 그대로인데 친구들은 더 나아간 모습을 봐서 인것 같다. 내 마음은 여전히 카오룽통 워털루 로드에서 떠들던 그 때 그대로인데, 거기에 남은 건 나밖에 없는 느낌이다.

앞으로 1년, 3년, 10년 후 우리 모습은 어떻게 될까.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은 이제 하고 싶지 않은데.... 다녀오고 나서 자꾸 후회와 그리움만 남는다.


6.

친구들한테 이렇게 고마워하는 걸 보니 이제 철이 든 걸까 아니면 그냥 이것도 잡생각인가..

가까이 있을 땐 보이지 않던 게 참 많은 것 같다. 그때 기억도 지나고 나니까 좋은 것만 다 남는다. 빨리 다시 볼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

Friday, March 17, 2017

밤의 해변에서 혼자 (On the Beach, at Night Alone, 2017)

1.
영화는 영화로 봐야 한다. 과연 그럴까.


2.
이 영화가 스크리닝 잡힌 날 한국에서도 언시가 있었다. 홍콩에서는 일부러 한국 신문을 찾아보지 않아서 감독 인터뷰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는데 그날 아침부터 카톡방에 홍상수 얘기로 이런저런 얘기가 오갔다.

사실 그런 큰 스캔들이 일어나면 영화보다는 영화 외적인 인터뷰가 더 그 영화를 덮어버리는 경우가 많아서 피하게 되는데 다행스럽게 이번 출장에서는 로밍을 안했다. 내가 그 감독의 사생활에 대해 그렇게 알아야 하나?


3.
홍상수 영화를 보면, 뭐 이런 걸 이렇게까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할 정도로 그냥 이야기를 술술 푼다. 이게 맨정신인지 아니면 전날 마신 술이 깨지 않아 이렇게 보이는 건지 헷갈리지만, 그래도 그렇게 술술 이야기에 빠져서 보고 나면 영화가 끝난다.

물론 홍상수 감독 영화에서 말을 많이 하는 남자들의 맨스플레인과 거기에 '하'하고 마치 선생님을 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젊은 여자들의 모습은 불편하고, 그 나누는 대화들이 정말 자신들의 예술에만 갖힌 궤변이라는 느낌은 떨칠 수가 없다..

진짜가 뭐고 가짜가 뭐고 진정성과 참예술에 대한 그들만의 리그라는 생각도 들면서 저런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는 있어야 하진 않나 싶다가도 그게 홍상수라는 게 짜증이 나다가 또 영화를 보면 아.. 이러고 넘어가는 복합적 감정의 변화다.


4.
영화는 솔직히 지금까지 본 홍상수 감독 영화중에 제일 재밌었다. 막 극적인 사건이 없는 홍 감독 영화에서 자신의 실제 삶이 극적 효과를 더해서일지 모른다. 진짜 얘기였을까 하는 추측을 하면서 영희의 모습에는 김민희를 덮고 문성근의 모습에는 홍상수를 덮으면 된다. 그러면 갑자기 영화는 스포츠 ㅁㅁ가 돼고 연예가 소식이 된다.

현장 스태프와 자신의 연인인 감독님 얘기를 하면서 "감독님 잘 계셔요?"라고 살랑거리며 묻는 영희의 모습은 베를린에서 그 모습을 닮았다. 이게 사실인지 아니면 영화가 사실이 된 건지 모르겠지만 (역시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되는 게 맞나보다)

자기는 남자 많이 만나봤고 놀건 다 놀았지만, 이제 더이상 얼굴 안본다는 영화 속 영화의 대사에서 그럼 당신은 이제 (홍상수 감독에게서) 뭘 보십니까...라고 묻고 싶은 마음이 90퍼센트였다.


5.
김민희의 목소리나 발성(쪼)를 안좋아해서 다른 영화보다 감동을 받지는 않았다. 아가씨때도 그랬고, 살짝 앵앵대는 목소리라 나는 흥이 깨졌다. 권해효의 너털 웃음도 괜히 개저씨의 너스레로 보이고, 정재영의 우물쭈물함은 답답한 중년 남자의 모습처럼 보이는 건 결국 내가 영화를 도덕에 맞춰 봐서 그런걸까?

영화가 도덕의 법칙을 따라야 할까. 간통이 도덕의 영역에서 어떻게 간주돼야 할까?

영화를 보는 내내 홍상수 기사에 분통을 터트리던 지인의 카톡으로 (컨벤션홀은 와이파이가 터진다) 폰은 쉴새없이 울렸고, 영화에 빠져들려다가도 "간통"이라는 글자를 떠올리며 나를 붙잡는 걸 보면서 과연 도대체 어디까지가 옳고 그른지 멍해졌다.




Wednesday, March 8, 2017

마른 손으로 모래알을 움켜쥐려는 것 같다. 아무리 힘을 쥐고 애써보지만 손을 펴면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는다.

뻣뻣한 상태로 버티는 데 익숙해지다보니 짜증이 나고 화가 난다. 도대체 뭐가? 왜?
감정이 들지 않고 그냥 무뎌지다가 이제는 메말라버리는 것 같아서 두렵다.

잠을 충분히 자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 오늘부터는 일찍 자보기로 했다. 7시간이 기본형이라길래 그것보단 적지만 그래도 평소보다는 많은 5~6시간 정도로? 중간에 깨지나 않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