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Penny Wise, Pound Foolish.
마이클 레젠데스라는 기자한테 메일을 보낸 적이 있다.
당신은 탐사 보도의가치를 뭐라고 생각하는지, 나는 탐사보도가 무척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이제 더이상 어떤 회사도 그렇게 수익성없는 사업에 돈을 쓰고 싶어하지 않는다면서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투정을 부린 적이 있다. (플러스, 왜 신문사는 더이상 신입을 뽑지 않냐 라는 푸념도 했다. 세상에. 국제 진상이다.)
당시 나는 몇 개의 국내 외 언론사 시험에서 줄줄이 떨어져서 한국 뿐만 아니라 외국 언론까지 모두 다 x까라는 식의 회의론에 빠져있던 상태였다. 언론은 무슨, 다들 기레기야 라는 식의 허무론에 빠져 그냥 다시 하던 회사 일에 열심히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극장판 사람들끼리 서울극장에서 별 기대없이 이 영화를 보고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던건지 보스턴 글로브를 뒤져서 이메일을 찾았고 그날 폰으로 이메일을 써서 보냈다.
그는 (기자답지 않게) 친절하게 바로 칼답을 보냈다.
(모든 기자가 친절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모든 기자에게서 일반 독자, 혹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한테 답변하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힘든 길이고, 수익도 낮지만 결국 이런 돈을 아끼는 건 푼돈이고 그로 인해서 결국 독자라는 장기적인 고객을 잃는다고 했다. 탐사보도를 하는 것이 언론의 특징이니까 이걸 안하면 결국 제 기능을 스스로가 포기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나는 그날 다시 집에 와서 논술 퇴고를 하고 잠든 기억이 난다.
2.
톰 맥카시 감독의 <스포트라이트>는 보스톤 글로브지의 탐사보도 팀 '스포트라이트' 이야기를 다뤘다. 미국 3대 일간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신문이 겪는 것처럼 수익 만들기는 어렵고, 광고나 독자를 잃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
스포트라이트 팀이 가톨릭 보스턴 교구 사제가 성추문을 저질렀다는 제보를 받으면서 이걸 기사화하는 게 영화의 큰 틀이다. 한 줄로 거칠게 말하면 '참기자 짱짱맨'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영화는 단순하다.
우리나라에서 기자와 정치, 사회부조리를 다룬 영화들처럼 권모술수도 없고, 피바람도 불지 않는다. 우리나라 기자들이라면 저런 위험한 짓을 할 때 혼자 차가 쌩쌩 다니는 길거리를 걷지도 않을 것이며, 피자를 누가 가져다준다면 그 안의 내용물을 의심할 것이고, 기록해놓은 파일이나 기자수첩은 복제와 복제를 해서 분산시켜놓을텐데 이 영화는 그런 장면은 전혀 없다. 영화에서 마이크가 혼자 돌아다니고 자꾸 주인공들이 밤에 무방비로 있는 별것 아닌 장면에서 오히려 긴장하게 되는 건 우리나라의 이례적인 케이스에 익숙해져서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사주가 나타나 "이게 뭐하는 짓이야 당장 나가" 식의 해고도 없고, 팀원들끼리 서로 내부 정치질하는 모습도 나타나지 않았다. 새로온 편집장 마티에 대한 경계심은 있지만, 그건 뭐 어딜 가도 볼 수 있는 이방인에 대한 경계로 보고 넘어갈 정도로 미미했다.
영화에서는 피해자들의 끔찍한 모습을 보여주거나, 그 사람들이 사건을 재연하는 모습도 담기지 않았다. 우리나라같으면 아래에서 찍는 샷으로 해서 최대한 '관음적'으로 재연했을 그 모습 대신 피해자들의 현재 모습과 그 순간을 되새기며 터지는 울음만 묵묵히 담았다.
기자들도 미드 뉴스룸에서처럼 멋지게 차려입고 연설하지 않는다. 화려한 조명이 비추는 뉴스룸도 없다. 어두컴컴한 사무실에 앉아 그저 이 사건에 왜 더 빨리 눈을 기울이지 않았을까 하는 로비의 자괴감과 우리는 이런 타운에 살고 있었어 라는 맷의 공포(사건을 조사하며 자신의 애들한테 절대 *저기엔* 가선 안된다고 경고를 한다.) 정도가 영화의 변주다.
선배의 조리돌림도 없고, 국장의 쪼이기도 없다. 그냥 묵묵히 하나의 '진실'만을 찾는 기자들의 모습만 보인다. 2001년이다보니 기자들은 수첩을 들고 직접 도서관의 인명부를 줄쳐가며 조사를 한다. 소셜미디어? 인터넷 창 움직이는 걸 봐도 *속도감*이 넘친다.
3.
탈진실의 시대다. 진실도 아니지만 거짓말은 아니었으니 됐다는 모순형용이 대통령의 입에서 나오는 시대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의 역할은 애매모호하다. 사람들은 더이상 언론을 믿지 않는다. 자극적인 탈진실에 눈길이 더 가다보니 수익원도 불분명해졌다. 소셜미디어다 1인미디어다 뭐다 하면서 정보에 대한 독점지배권도 사라진 지 오래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사는 짧은 단타 수익에 빠지거나 (일명 기레기, 특종, 단독 저널리즘) 아니면 정파 저널리즘에 빠지거나 (NYT) 혹은 사라지기 일쑤다. 영국에서 좋아하던 인디는 이제 더이상 종이신문을 내지 않고, 라이프지는 2007년 사라졌다.
며칠 전 (아이러니컬하게 제3의 언론인) 네이버에서 무료 영화로 이 영화가 풀리면서 다시 봤다. 여전히 좋았고, 네이버에 뜬 뉴스를 흘끗흘끗 보면서 영화를 보니 처음 봤던 때보다 더 슬펐다. 영화에서도 결국 사회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교구장은 다시 승진을 했고, 피해자들은 여전히 트라우마가 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언론 보도로 조금 나아갈 듯 하면 결국 빵빵 하나씩 터지고, 상상의 범주를 넘은 기괴한 일들이 기괴한 제목을 달고 매일 나온다. 나는 헌재 재판관 내정자가 왜 흙수저로 기사화되는지 모르겠고, 용의녀라는 단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여전히 MSG맛 가득한 기사들 사이에서 뭔가 하나를 찾기 위해 계속 읽지만 찾기가 어렵다.
이제는 더 이상 언론에 무언가를 기대하고 읽지는 않는다. 그냥 습관이라서 읽고 읽지 않으면 어색해서 읽는다. 사람은 언젠가는 변하니까 내 습관도 곧 변할 지 모른다. 그렇지만 나같은 Pound를 위해서 Penny를 쓸 수 있는 언론사들이 남아 내가 이 오래된 습관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4.
쓰고나서 포털 뉴스를 보는데 여기가 무간지옥이구나 싶다.
5.
마티 바론은 WP에 갔다. 마이크는 여전히 보스턴에 남아서 열심히 글을 쓴다. 아마존을 업은 WP의 화려함을 따라잡을 수는 없지만, 기사 자체는 보스턴 글로브가 더 재밌다. 미국 가게 되면 종이신문으로도 사서 읽고 싶다. (전자화 되기 전에 미국가겠단 소리다.)
Penny Wise, Pound Foolish.
마이클 레젠데스라는 기자한테 메일을 보낸 적이 있다.
당신은 탐사 보도의가치를 뭐라고 생각하는지, 나는 탐사보도가 무척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이제 더이상 어떤 회사도 그렇게 수익성없는 사업에 돈을 쓰고 싶어하지 않는다면서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투정을 부린 적이 있다. (플러스, 왜 신문사는 더이상 신입을 뽑지 않냐 라는 푸념도 했다. 세상에. 국제 진상이다.)
당시 나는 몇 개의 국내 외 언론사 시험에서 줄줄이 떨어져서 한국 뿐만 아니라 외국 언론까지 모두 다 x까라는 식의 회의론에 빠져있던 상태였다. 언론은 무슨, 다들 기레기야 라는 식의 허무론에 빠져 그냥 다시 하던 회사 일에 열심히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극장판 사람들끼리 서울극장에서 별 기대없이 이 영화를 보고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던건지 보스턴 글로브를 뒤져서 이메일을 찾았고 그날 폰으로 이메일을 써서 보냈다.
그는 (기자답지 않게) 친절하게 바로 칼답을 보냈다.
(모든 기자가 친절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모든 기자에게서 일반 독자, 혹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한테 답변하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힘든 길이고, 수익도 낮지만 결국 이런 돈을 아끼는 건 푼돈이고 그로 인해서 결국 독자라는 장기적인 고객을 잃는다고 했다. 탐사보도를 하는 것이 언론의 특징이니까 이걸 안하면 결국 제 기능을 스스로가 포기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나는 그날 다시 집에 와서 논술 퇴고를 하고 잠든 기억이 난다.
2.
톰 맥카시 감독의 <스포트라이트>는 보스톤 글로브지의 탐사보도 팀 '스포트라이트' 이야기를 다뤘다. 미국 3대 일간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신문이 겪는 것처럼 수익 만들기는 어렵고, 광고나 독자를 잃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
스포트라이트 팀이 가톨릭 보스턴 교구 사제가 성추문을 저질렀다는 제보를 받으면서 이걸 기사화하는 게 영화의 큰 틀이다. 한 줄로 거칠게 말하면 '참기자 짱짱맨'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영화는 단순하다.
우리나라에서 기자와 정치, 사회부조리를 다룬 영화들처럼 권모술수도 없고, 피바람도 불지 않는다. 우리나라 기자들이라면 저런 위험한 짓을 할 때 혼자 차가 쌩쌩 다니는 길거리를 걷지도 않을 것이며, 피자를 누가 가져다준다면 그 안의 내용물을 의심할 것이고, 기록해놓은 파일이나 기자수첩은 복제와 복제를 해서 분산시켜놓을텐데 이 영화는 그런 장면은 전혀 없다. 영화에서 마이크가 혼자 돌아다니고 자꾸 주인공들이 밤에 무방비로 있는 별것 아닌 장면에서 오히려 긴장하게 되는 건 우리나라의 이례적인 케이스에 익숙해져서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사주가 나타나 "이게 뭐하는 짓이야 당장 나가" 식의 해고도 없고, 팀원들끼리 서로 내부 정치질하는 모습도 나타나지 않았다. 새로온 편집장 마티에 대한 경계심은 있지만, 그건 뭐 어딜 가도 볼 수 있는 이방인에 대한 경계로 보고 넘어갈 정도로 미미했다.
영화에서는 피해자들의 끔찍한 모습을 보여주거나, 그 사람들이 사건을 재연하는 모습도 담기지 않았다. 우리나라같으면 아래에서 찍는 샷으로 해서 최대한 '관음적'으로 재연했을 그 모습 대신 피해자들의 현재 모습과 그 순간을 되새기며 터지는 울음만 묵묵히 담았다.
기자들도 미드 뉴스룸에서처럼 멋지게 차려입고 연설하지 않는다. 화려한 조명이 비추는 뉴스룸도 없다. 어두컴컴한 사무실에 앉아 그저 이 사건에 왜 더 빨리 눈을 기울이지 않았을까 하는 로비의 자괴감과 우리는 이런 타운에 살고 있었어 라는 맷의 공포(사건을 조사하며 자신의 애들한테 절대 *저기엔* 가선 안된다고 경고를 한다.) 정도가 영화의 변주다.
선배의 조리돌림도 없고, 국장의 쪼이기도 없다. 그냥 묵묵히 하나의 '진실'만을 찾는 기자들의 모습만 보인다. 2001년이다보니 기자들은 수첩을 들고 직접 도서관의 인명부를 줄쳐가며 조사를 한다. 소셜미디어? 인터넷 창 움직이는 걸 봐도 *속도감*이 넘친다.
3.
탈진실의 시대다. 진실도 아니지만 거짓말은 아니었으니 됐다는 모순형용이 대통령의 입에서 나오는 시대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의 역할은 애매모호하다. 사람들은 더이상 언론을 믿지 않는다. 자극적인 탈진실에 눈길이 더 가다보니 수익원도 불분명해졌다. 소셜미디어다 1인미디어다 뭐다 하면서 정보에 대한 독점지배권도 사라진 지 오래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사는 짧은 단타 수익에 빠지거나 (일명 기레기, 특종, 단독 저널리즘) 아니면 정파 저널리즘에 빠지거나 (NYT) 혹은 사라지기 일쑤다. 영국에서 좋아하던 인디는 이제 더이상 종이신문을 내지 않고, 라이프지는 2007년 사라졌다.
며칠 전 (아이러니컬하게 제3의 언론인) 네이버에서 무료 영화로 이 영화가 풀리면서 다시 봤다. 여전히 좋았고, 네이버에 뜬 뉴스를 흘끗흘끗 보면서 영화를 보니 처음 봤던 때보다 더 슬펐다. 영화에서도 결국 사회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교구장은 다시 승진을 했고, 피해자들은 여전히 트라우마가 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언론 보도로 조금 나아갈 듯 하면 결국 빵빵 하나씩 터지고, 상상의 범주를 넘은 기괴한 일들이 기괴한 제목을 달고 매일 나온다. 나는 헌재 재판관 내정자가 왜 흙수저로 기사화되는지 모르겠고, 용의녀라는 단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여전히 MSG맛 가득한 기사들 사이에서 뭔가 하나를 찾기 위해 계속 읽지만 찾기가 어렵다.
이제는 더 이상 언론에 무언가를 기대하고 읽지는 않는다. 그냥 습관이라서 읽고 읽지 않으면 어색해서 읽는다. 사람은 언젠가는 변하니까 내 습관도 곧 변할 지 모른다. 그렇지만 나같은 Pound를 위해서 Penny를 쓸 수 있는 언론사들이 남아 내가 이 오래된 습관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4.
쓰고나서 포털 뉴스를 보는데 여기가 무간지옥이구나 싶다.
5.
마티 바론은 WP에 갔다. 마이크는 여전히 보스턴에 남아서 열심히 글을 쓴다. 아마존을 업은 WP의 화려함을 따라잡을 수는 없지만, 기사 자체는 보스턴 글로브가 더 재밌다. 미국 가게 되면 종이신문으로도 사서 읽고 싶다. (전자화 되기 전에 미국가겠단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