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March 20, 2017

小幸運

1.
이제 출장이 다 끝났다. 싱가포르, 공항들, 그리고 홍콩까지 왔다갔다하면서 몇 번의 리젝션 문자와 쓴 술을 비웠고, 몇 번의 회식과 술자리를 거치니 3월도 거의 끝나간다.


2.
2010년 8월, 홍콩 카오룽통 캠퍼스에서 이 친구들을 만난 건 우주의 기적같은 일이었다.

나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했다. 점수는 있었지만 어떻게 말하는 지 몰랐고, 플랫한 사운드였다. 그리고 나는 표정이 없었다. 티미드한 아시안 걸의 전형적인 모습이 나였다. 이주현.

땀이 삐질삐질 나는 카오룽통 캠퍼스 거리에서 뭔가 말을 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외국 애들의 제스처에 나도 모르게 기가 죽었다. 교환학생 모임에서 뒤로 쳐졌다. 음식도 가리는데 첫날 먹은 음식이 KLC의 태국 생새우 요리였다. 집에도 가고 싶었고, 모든 게 다 싫었다. 나는 피곤한데 자꾸 디저트를 먹으러 (그놈의 망고푸딩) 새벽까지 그 더운 거리에서 망고푸딩을 (맥주도 아니고) 먹으면서 못 알아듣는 영어 대화에 희미하게 미소만 지어야 했다. 온지 일주일만에 유일하게 나한테서만 베드버그가 나와서 온몸이 가려워서 집에 가겠다고 스물셋의 나이에(거기 나이로는 스물둘) 엉엉 울며 집으로 전화를 했다. 홍콩 영화에서 본 푸르스름하던 홍콩의 모습은 그냥 곰팡이 냄새가 나는 퀴퀴한 더러운 도시였다.

만약 친구들이 없었다면 나는 이마리가 아닌 이주현으로 그저 그렇게 지내다 학기 중간에 그냥 돌아왔을 지 모른다. 아니 그랬을 것 같다.


3.
윙은 케이팝을 좋아했다. 정확히 말하면 빅뱅과 비스트를 좋아했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게 그렇게 고마운 적이 없을 정도로, 한국인이라고 하니까 이러저러한 케이팝 얘기를 했다. 그리고 윙은 친절하게 내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를 기다려줬고, 자기가 알고 있는 친구 에미를 소개해줬다. 그 옆에 서있던 애거스와 함께 우리는 한 모임이 됐다.

브리티쉬 본 차이니즈, 홍콩 출신인 윙을 알게 돼서 모든 게 편해졌다. 음식을 직접 주문하지 않아도 윙은 내가 먹는 걸 귀신같이 잘 알아채 주문해줬다. 혼자 밥을 못먹어서 밥을 굷거나 징징대기 일쑤였던 나한테 어디 나갈까 하고 물어봐줬다. 내가 그때 얼만큼 진상이었냐면 아침도 혼자 먹기 싫다고 윙 기숙사방에 가서 (8층이었나....) 문 두드린 적도 있었다. 아침잠 많은 윙한테 아침 먹자고 징징댄 걸 생각하면 참 개진상이다.

쇼핑을 좋아하는 윙이랑 친해진 덕분에 한 학기동안 거의 매일매일 쇼핑을 다녔다. 그때 처음 내 옷 취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고, 머리를 기르고 묶고, 힐을 신고 뛰는 것도 그때 익숙해졌다. 내 어설픈 요리를 좋아해준 윙 덕분에 지나고 나서도 요리에 취미를 붙였다. 맨체스터에서 내가 해준 야매 한식에 항상 쏘 나이스하다고 하더니, 우리집 와서는 엄마가 해준 달걀 프라이가 제일 맛있다고, 꼭 그거 다시 먹고 싶다고 그러더라.

양수오에서 장이 꼬여 쓰러졌을 때는 윙이 우리 집에 전화해준 덕분에 부모님은 딸내미가 이역만리 중국땅의 병원에서 링거맞고 울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고, 그 일을 여전히 우려먹으며 내 생명을 살려줬다고 으쓱댄다. (물론 정말 고맙다만 이제 그만 좀 하자.)

윙이 아니었다면 맨체스터로 다시 갈 일도 없었을테고, 아마 그랬다면 내 삶은 많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지금도 영국을 다녀온 걸 후회하다가 또 만족하다가 오락가락 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이렇게 만날 수 있는 건 그만큼 함께 붙어 지낸 시간이 많아서일지 모른다. 내가 영어로 밥벌이는 할 수 있게 된 것도, 이제 홍콩 요리를 한식보다 더 좋아하게 된 것도 다 윙이랑 같이 지낸 시간이 만든 변화였다.

물론 같이 살다보니 (내 잘못이 컸지만) 윙이랑 부딪히는 경우도 많았고, 한 1년 정도는 거의 연락을 안하고 지냈다. 근데 지금 생각하면 내가 너무 어렸고 철이 없었고 거의 다 내 잘못이었다. 내 위생관념이 아니라 거의 결벽에 가까운 진상짓이었고. 지난 겨울에 집에 놀러왔을때도 짜증 많이 냈는데 미안하네.

이번 출장 때 홍콩 친구랑 일요일에 배드민턴 쳤다고 하니까 지인은 "홍콩에 집있냐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나는 집은 없지만, 집처럼 의지할 친구 아니 그 이상의 시스터후드가 홍콩에 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


4.
존이랑 친해진 건 진짜로 미라클 오브 미라클, 우주의 기적이다.

교환학생들 오티 모임에서 레인보우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자리가 있었다. 그때 내 테이블 대각선 앞에 앉아있던 존은 카이시라는 저장성 출신 애랑 앉아있었다. (나는 이 둘이 베프인 줄 알았는데 이날 처음 만났다고) 나는 무슨 말을 할 지도 몰랐고, 사실 존도 표정이 가만히 있으면 엄청 쎄-한 편이라 그냥 조용히 밥만 먹고 옆 테이블에 있던 친한 교환학생 모임 애들이랑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초반에 얘도 좀 빻은 질문 (ie. 한국사람들은 진짜 공자를 니네 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하냐.. 왜 너네는 중국꺼를 다 가져가려고 하냐, 천안문 사태는 미국의 조작 아닐까 등등)을 많이 해서 "난 얘랑은 절대 친해질 수 없을 거다"라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역시 네버 세이 네버.

가을 학기 끝나고 다들 집으로 돌아갔을 때 매일 나한테 전화를 해준 건 존이었고, 매일 저녁 밥을 같이 제일 많이 먹은 건 존이었다. 전공이 비슷하다보니 수업도 학기마다 세네개는 같이 듣고 그룹 워크도 같이 했다. 나는 수업을 많이 째는 편이었고 존은 수업 예습을 많이 하는, 완전 다른 트랙에 서있는 스타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수업 째고 놀자고 진상을 많이 부렸던 것 같다. 같이 미술관도 가고, 시위도 가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첫날의 다짐과는 달리 매일 연락하던 친구가 됐다.

아직도 기억나는게 5월 22일, 그러니까 존이 돌아가는 날 기숙사 캔틴에서 다같이 밥 먹다가 내가 너무 울어서 카레가 넘쳤다. 윙도 아니고 로라도 아니고 존이 하루 먼저 간다는 소식에 너무 놀라서 펑펑 울었다. 주하이에서 온 부모님이랑 같이 돌아가는 존을 보면서 기숙사 앞에서 세상 무너지는 듯 울었고 그날 방안에 들어가서도 내내 울었다. 분명 다시 볼 수 있는 거리인데 왜 나는 다시 못 볼거라고 생각했던걸까. 중국까지 고작 해봐야 두 시간인데. 그때는 누구랑 헤어지는 게 무서웠고 끝을 보는 게 너무 버거워서 할 수 있는 건 우는 일밖에 없었다.

밤에 호텔에서 다시 돌아온 존이랑 룸메였던 레이몬드, 우리 모임 페이슨 나 이렇게 넷이서 마지막날 밤 술을 마셨다. (이 멤버에 로라, 윙, 에미까지 더해서 우리는 아직도 단체 위챗방에서 여전히 헛소리를 한다.)

돌아와서 디비알 인턴을 하는 내내 매일 사무실에서 스카이프를 했고 대학원 얘기, 취업 얘기,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그리고 기적처럼 내가 영국 가기 1주일 전에 영국 근처의 쉐필드에서 존은 석사를 했다. 존이 있던 덕분에 윙이랑 싸우고 맨체스터가 싫어진 날에는 존이랑 만나서 리버풀도 가고, 한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했던 2013년 내 생일 즈음에는 존이랑 내 인생영화인 위대한 개츠비를 보고 밥을 먹었다. 그러다가 일을 하게 돼서 좀 더 영국에 남게 됐고, 런던에서 내려갔을 때도 거기서 인턴하고 있던 존을 만나고, 피같은 오프를 내서 존 졸업식에도 다녀왔다.

지금도 존은 참 착하고 좋은 친구다. 매년 만날 때마다 배울 게 있는 친구고, 그 친구를 볼 때마다 나는 왜 이렇게 쓰레기처럼 놀기만 했을까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5.
친구들에 대해서 쓰고 싶은 말은 더 많은데 이렇게밖에 말하지 못하는 게 참 답답하다.

다녀오고 나서 허한 마음이 더 드는 건 나는 그대로인데 친구들은 더 나아간 모습을 봐서 인것 같다. 내 마음은 여전히 카오룽통 워털루 로드에서 떠들던 그 때 그대로인데, 거기에 남은 건 나밖에 없는 느낌이다.

앞으로 1년, 3년, 10년 후 우리 모습은 어떻게 될까.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은 이제 하고 싶지 않은데.... 다녀오고 나서 자꾸 후회와 그리움만 남는다.


6.

친구들한테 이렇게 고마워하는 걸 보니 이제 철이 든 걸까 아니면 그냥 이것도 잡생각인가..

가까이 있을 땐 보이지 않던 게 참 많은 것 같다. 그때 기억도 지나고 나니까 좋은 것만 다 남는다. 빨리 다시 볼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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