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October 20, 2016

걷기왕 (Queen of Walking, 2016)

1.
고등학교때부터 20대 초반까지는 일본 청춘영화를 정말 싫어했다. 왜 난 힘을 내기 싫은데 '발랄하고 명랑하게' 힘을 내라고 깔깔대며 웃는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히토리나쟈나이' 류의 엔딩이 싫었지만 또 싫었떤 건 하루키식의 허무주의. 그냥 우린 그랬지, 아 아무 쓸모없어 다 필요없어 이러는 것도 그냥 싫었다. 청춘영화에서 느껴지는 그 '메가리 없는' 가벼움이 영화를 망가뜨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유행은 한국을 거쳐 요즘 대만으로 넘어간 것 같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에서 올드독은 그 '대책없는 청순함'을 물고기떼같다고도 했다. 나도 이 목적없고 대책없는 발랄함이 싫었는데 갑자기 어느 순간부터 그게 '귀여워'보였다.

귀여우면 지는거고, 그냥 생각없이 이런 움직임들에 몸을 맡기면 나도 모르게 '청춘 파워'가 샘솟는다. 세상 살면서 8천원정도에 이정도 활력 얻기 쉽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 이후로부터 청춘 영화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2.
<걷기왕>은 일본 청춘영화를 닮았다.

'히토리쟈나이', '좀 느리면 어때', '내가 뒤쳐졌니?' 하는 얘기는 그 때는 정말 할 수 있는 얘기다. 저 나이를 거치면서 저런 질문을 해보지 못한 내가 아쉬울 정도로 영화는 계속 질문을 한다.

주인공 만복이는 교통편만 타면 멀미를 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래서 두 시간, 왕복 네 시간을 걸어 학교를 가지만 그거 외에는 하는 게 정말 아무 것도 없다. 섬에 살아도 EBS는 봐야하겠지만, 영화에서 만복이 공부하는 장면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꿈도 없고, 뭔가 목표도 없고 잘하는 것도 없어보이는 만복이 앞에 자기계발서형 인간인 담임이 나타나서는 '그래 넌 걷기를 잘하는구나' 하면서 갑자기 경보를 시킨다. 경보가 뭔지도 모르는 애한테 그냥 뜬금포로 던졌는데 그게 훅 하고 들어간거다.

육상부에 들어갔더니 '이글이글 노력형' 수파르타 수지선배는 고깝다. "Everyone is all-in, except you"라고 자막처리된 대사 (한국어 영화지만 이 자막이 더 기억에 훅 들어옴)를 보고 요즘 뜬다는 자기 계발서 제목인 '당신은 겉보기에만 노력할 뿐'도 생각나고 김미경 이지상 등등 떠오르는 얼굴이 많았다.

수지가 나쁜 유형은 아니다. 다만 욕심이 있었고, 그 욕심을 위해 자기는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근데 노력이 당연한 게 되고 노력이 한도를 초과하면서 자신을 헤치고 그러다보니까 피로가 쌓이는거지.


3.
영화는 뜬금없이 귀엽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청춘영화를 '오글댄다'는 이유로 거의 보지 않는다. 감정과잉, 자기연민된 영화나 소설에 몸서리쳐하는데 그래도 이 영화는 '귀여워'서 견뎠다.

심은경이 되게 귀엽구나 하는 걸 이 영화 보면서 느꼈고 주변 인물상들이 '과장'된 전형성을 연기하지만, 그래도 '귀엽다'. 힙합하는 배달오빠도 귀엽다. 찌질하게 하는 랩 하나도 짜식, 귀엽다 하고 보게 되고 그 나이에만 할 수 있는 얘기를 하기 때문에 귀엽다. 애기들이 '하하호호'하는 걸 보면서 "나도 저땐 저랬나?"하면서 과거를 회상해보지만 내 과거는 저렇게 하하호호는 아니었고 상큼발랄하지도 않았다. 이런 대리만족이라도 뒤늦게 할 수 있어 다행인건지 모른다. 운동 모션도 약간 족구왕처럼 과장된 몸동작이 들어가서 만화같은 느낌을 줘서 귀엽다. 자꾸 반복하지만 이 영화는 정말 귀엽다. 수지 역할 한 배우는 뭔가 고등학교에서 있을 법한 포스있는 동아리 선배 느낌이 그대로 나서 그때 내 고등학교 시절을 되돌아 보지만. 우리 동아리는 그냥 이나중 탁구부같네. 아다치 미츠루(대표작 - H2, 탓-치)일 줄 알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후루야 미노루(이나중 탁구부, ) 스타일로 격하게 놀았네.



배경음악도 귀엽다. 페퍼톤스의 초창기 느낌도 나고, 홍대 2000년대 후반 (eg. 타루, 캐스커, 옥상달빛 등등) 음악처럼 '대책없이 경쾌하고 사랑스러운' 싸이 bgm으로 쓰면 꽤나 상큼하면서도 센스있어보이는 그런 음악이다. 심은경이 엔딩송도 불렀네.

여하튼 모든 건 다 귀여운 게 이긴다. 인간관계에서도 쟤 뭐야 하다가도 어, 귀엽네? 하면 지는거다. 라이언이 지금 한국 소비시장을 뒤흔드는 것도 귀여워서다. 모든 건 귀엽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4.
요즘 뜬금없이 노력충이 돼서 나름대로 진지하게 열심히 해보고 있는데 잘 안됀다.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겠고, 나는 뒤쳐지는데 남들은 다 앞서나가는 느낌이라 지긋지긋하다. 다시 4년전처럼 다 내려놓고 비행기 타고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씩 자란다.

영화에서 나온 대사처럼 Am I lagging behind? Am I not good enough? 매일 이 질문을 수십 수백 번씩 나한테 던지는데 답을 잘 모르겠다. 나는 열심히 발버둥치는데 항상 10미터, 아니 그보다 더 뒤쳐져가는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더럽다. 부산에서 마켓 시사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가는 데 되게 찌질하게 울었다. 아는 사람들이 볼까 창피하지만 정말 끅끅대면서 울었다. 지금 내 상황이랑 오버랩되는 지점이 많아서 와르르 무너졌다.

이 영화 결론처럼 조금 느리게 가도 되겠지, 하다가도 자다가 소스라쳐서 깨고, 뭔가 다시 나가야 하나, 너무 한 곳에 오래 있었나 이런 생각도 들고. 복잡하다. 영화는 10대 얘긴데 이제 30을 앞두고 생각이 더 많아졌다. 정말 뒤늦게 사춘기라고 하기도 창피한 미숙한 불안함이 자꾸 올라와서 짜증난다. 

3 comments:

  1. This comment has been removed by the author.

    ReplyDelete
  2. 사춘기가 변화의 다른 이름이라면 우리는 죽는 날까지 사춘기가 계속되다 가는 거 아닐까요. 단순하고 평탄한 거 보다, 복잡하고 고민많은 게 언니 매력이니까 징징대도 돼여. 들어드립니다.물론 귀찮은 티를 낼 때도 있겠지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ReplyDelete
    Replies
    1. 아닌대, 내 메력은 긔여움인대~ 아 더럽다 댓글...ㅋㅋㅋㅋ

      Dele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