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September 9, 2016

천성

1.
어릴 때 할머니 손에서 컸다. 내 기억속의 할머니는 항상 설거지를 했고 바닥의 먼지를 쓸고 닦았으며, 매 순간 머리카락 하나까지 주워서 치울 정도로 깔끔했고 부지런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모든 게 정갈하고 깔끔했다. 할머니 집은 이곳저곳이 오래됐지만 항상 반들반들하게 청소가 돼 있었다.

이런 성격을 많이 닮은 우리 아부지, 내가 맨날 이부장님 이사장님이라고 부르는 우리 아빠도 마찬가지다. 술을 그렇게 좋아해서 새벽 늦게 들어와도 다음날 더 일찍 일어난다. 이유인즉슨,

"술 좋아하면서 게으르기까지 하면 안된다. 술 마신 날은 더 부지런해야 한다. 그래야 술 마시는 게 책잡힐 일이 아니라 술 좋아하는 넉살좋은 사람이 된다." 고 했다. 은퇴한 지 몇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아빠는 일찍 일어난다.

나는 그게 나한테 내려온 유전자일 '줄' 알았다.


2.
나는 이씨 집안의 이런 유전자는 전혀 받지 못한 것 같다. (그렇다고 엄마가 게으른 건 아니다만...) 물론 보고 자란 게 있어 쪼고 쪼아서 겨우겨우 부지런한 척은 해보려고 하지만 내 마음속의 부지런함과 내 천성은 역방향으로 움직인다.

지금 이 글을 쓰는 9월 9일 오후 14시 44분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오늘까지 하려고 한 서류는 계속 그 상태로 답보중이고, 엑셀의 칸 몇 개도 채우지 못했다. 운동 다녀와서도 물 먹은 솜마냥 계속 멍하니 멍 때리고 있었다. 이게 요 며칠 사이의 일이다. 이상하게 아무 것도 하기 싫어서 정말 매번 마감날 "욕욕욕" 온갖 욕을 입에 물고 시간과 싸워 끝내는 습관이 들었다. 예전에는 마감일이 아니라 시작일을 기준으로 일을 처리했는데, 그랬던 이주현은 고인이 되었고, 이제 서반야산 게으름만 잔뜩 얻어가지고 돌아온 이마리가 그 자리에 있다.

플래너를 쓰고 시간을 쪼개고 짐을 바리바리 짊어지고 다니면서 부지런을 떨어보려고 하지만, 천성이라는 덫은 나를 항상 게으른 상태로 끌고 간다. 요 며칠 몰스킨이 어디있는지 챙겨보지도 않았다. 아마 백지로 일주일을 나는 건 처음일 것 같은데 어디까지 게을러질 수 있나 테스트나 해볼까.


3.
전시도 봐야 하고 일도 해야 하고 사람들도 만나야 하고 방정리도 좀 해야할 것 같은데 마음속에서 외침으로만 끝난다.

일을 더 늘리면 이게 좀 나아질까. 매일매일 데드라인을 챙기다보면 또 이런 천성이 잠시 숨죽일지 모른다. 근데 또 하기가 싫다. 아 이 무슨 에너지 뱀파이어 좀비 중2병같은 징징댐인지. 마지막 20대에 이게 뭐하는 짓이냐. 에라 나가서 접싯물에 코박고 죽자. 하려고 했는데 아직 옷도 안갈아입고 화장도 안했네. 이렇게 오늘 하루 더 게을러져야겠다.......


4.
나한테는 좀 더 엄격해야 할 것 같다. 오늘 핑계는 날씨가 구려서, 어제 핑계는 비가 와서, 그제 핑계는 뭔가 또 있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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