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는 폰 와이파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랩탑만 가끔 돌리고 폰은 그냥 데이터로만 썼다.
사진을 정리한다고 그냥 한 300장을 뭉텅이로 지웠다. 당연히 99달러 주고 프로로 업데이트한 드롭박스에 저장되었을거라 생각하면서 깡그리 지웠다. 썸네일 캐시 이런 것도 깔끔하게 지웠다.
문제는 내가 와이파이에서만 싱크를 하게 해놔서 저장이 하나도 안됐다.
며칠전에 블로그에 사진을 올리려고 봤는데 스페인 사진만 덩그러니 있고 파리는 아무것도 없다. 피카소 뮤지엄도, 세 번이나 허탕치고 가서 올라간 노트르담 꼭대도, 울면서 미사듣던 노트르담 성당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온리 스페인 저스트 스페인. 아 물론 스페인이 나쁘지 않았지만 심혈기울인 사진은 다 파리였는데. 공부하려고 찍어놓은 몇 장면도 있었는데 다 사라졌다.
완전 패닉... 어 뭐지? 내가 왜 이랬지 하는 생각부터 바로 데이터 복원을 뒤졌다.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다운받아 끙끙대기도 하고 혹시 없을까 계속 드롭박스를 들락날락하고 그러다가 데이터 복원까지 찾아봤다.
국정원, 세월호 사건에서나 보던 데이터 포렌식을 검색해보니 꽤 업체가 많았다. 세월호 폰 복원 기사에서 많이 보이던 업체에 전화를 했다.
가입증서랑 신분증같은 걸 준비해서 찾아가면 된다고 해서
그냥
갔다.
프린터는 엄마아빠방에 있고 나는 올레에 가입하지 않아서 귀찮았고 가면 더 빠른 방법이 있을 것 같아서 그냥 갔다.
들어가서 "데이터 복원때문에 왔는데요..." 했더니 "여기 번호랑 필요한 서비스에 체크만 해주세요" 하고 요금을 설명한다. 전화로 들었던 가입증서도 달라고 하지 않았고 신분증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이거 하시면 삼성페이는 포기하셔야돼요"
편의점에서 쏠쏠하게 쓰고 있어서 아쉬웠는데, 어차피 곧 폰을 바꿀 것 같아서 진행하기로 했다.
절차는 간편했다.
기본 요금을 우선 내고 세 시간 정도 기다렸다가 폰을 찾는다. 그 다음날 오후정도에 팀뷰어로 어떤 파일이 복원됐고 사진이 몇 장정도 됐는지를 듣는다. 그리고 결제하면 파일을 받는다.
팀뷰어로 볼때 어 파리 사진이 있다, 기쁜 마음에 바로 결제했다.
사진 파일을 쭉 받고 보는데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한 번도 본 적없는 카카오톡 대화상대의 프로필 사진이 다 저장돼있었고, 인스타에서 좋아요만 한 번 눌렀던 외국 사람의 사진이 저장돼있었다. 내가 올린 사진들의 썸네일이 부분부분 저장돼있었고 여러 메신저에서 나랑 얘기하던 사람들의 프로필이 차곡차곡 다 복원됐다.
결국 나는 내가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정보를 그 사람들 모르게 복원해 갖게 된거다.
이건 그래도 내 폰이었지만, 대부분의 업체에서 문자 복원, 통화목록 복원, 아니면 메신저 대화 복원같은 서비스까지 하고 있기 때문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정보는 복원되고 기록될 지 모른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사람은 내가 그 사람의 프로필의 변화를 다 가지고 있다는 걸 모르겠지. 인스타에서 내가 본 모든 사진이 저장돼면서 내가 팔로우한 사람의 개인적 사진도 다 복원됐다.
결국 무작위로 복원시키는 이 기술 덕분에 나는 지금도 어디선가 복원돼고 있을지 모른다. 이렇게 엄청난 세상에 살고 있는데 이 기술은 점점 더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개인의 정보가 '개인 정보'가 個人이 아니라 開人정보가 된거다.
파리 사진이 복원 됐는데.... 2016년 5월이 아니라 2015년 5월이다. 결국 이 사진은 증발해버렸고 나는 내가 알거나 모르는 사람들의 무수한 사진과 내 돈, 삼성페이를 맞교환했다. 그냥 잃은 건 잡지 말고 Let it go해야 했다.
더 웃긴 건 2015년에 본 그림인데도 2016년에 하나도 기억 못하고 "이런 건 처음이다"라고 일기를 썼다는거다. 그니까 처음 봤다 이러면서 오오오 했지만 난 이걸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반복했다. 그림을 보고 내가 뭔가 달라지거나 미적 감각이 엄청나게 늘지 않는 이유인건가.
이 일을 계기로 사진보다 직접 쓰고 보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이번 주말부터 동네 문화센터에서 뎃생을 배우기로 했다. 기록해서 붙잡고 있다는 게 우습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젠 정말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기록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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