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y 31, 2016

Let it go

파리에서는 폰 와이파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랩탑만 가끔 돌리고 폰은 그냥 데이터로만 썼다.

사진을 정리한다고 그냥 한 300장을 뭉텅이로 지웠다. 당연히 99달러 주고 프로로 업데이트한 드롭박스에 저장되었을거라 생각하면서 깡그리 지웠다. 썸네일 캐시 이런 것도 깔끔하게 지웠다.

문제는 내가 와이파이에서만 싱크를 하게 해놔서 저장이 하나도 안됐다. 
며칠전에 블로그에 사진을 올리려고 봤는데 스페인 사진만 덩그러니 있고 파리는 아무것도 없다. 피카소 뮤지엄도, 세 번이나 허탕치고 가서 올라간 노트르담 꼭대도, 울면서 미사듣던 노트르담 성당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온리 스페인 저스트 스페인. 아 물론 스페인이 나쁘지 않았지만 심혈기울인 사진은 다 파리였는데. 공부하려고 찍어놓은 몇 장면도 있었는데 다 사라졌다.

완전 패닉... 어 뭐지? 내가 왜 이랬지 하는 생각부터 바로 데이터 복원을 뒤졌다.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다운받아 끙끙대기도 하고 혹시 없을까 계속 드롭박스를 들락날락하고 그러다가 데이터 복원까지 찾아봤다.


국정원, 세월호 사건에서나 보던 데이터 포렌식을 검색해보니 꽤 업체가 많았다. 세월호 폰 복원 기사에서 많이 보이던 업체에 전화를 했다.

가입증서랑 신분증같은 걸 준비해서 찾아가면 된다고 해서

그냥
갔다.

프린터는 엄마아빠방에 있고 나는 올레에 가입하지 않아서 귀찮았고 가면 더 빠른 방법이 있을 것 같아서 그냥 갔다.

들어가서 "데이터 복원때문에 왔는데요..." 했더니 "여기 번호랑 필요한 서비스에 체크만 해주세요" 하고 요금을 설명한다. 전화로 들었던 가입증서도 달라고 하지 않았고 신분증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이거 하시면 삼성페이는 포기하셔야돼요"
편의점에서 쏠쏠하게 쓰고 있어서 아쉬웠는데, 어차피 곧 폰을 바꿀 것 같아서 진행하기로 했다.

절차는 간편했다.
기본 요금을 우선 내고 세 시간 정도 기다렸다가 폰을 찾는다. 그 다음날 오후정도에 팀뷰어로 어떤 파일이 복원됐고 사진이 몇 장정도 됐는지를 듣는다. 그리고 결제하면 파일을 받는다.

팀뷰어로 볼때 어 파리 사진이 있다, 기쁜 마음에 바로 결제했다.

사진 파일을 쭉 받고 보는데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한 번도 본 적없는 카카오톡 대화상대의 프로필 사진이 다 저장돼있었고, 인스타에서 좋아요만 한 번 눌렀던 외국 사람의 사진이 저장돼있었다. 내가 올린 사진들의 썸네일이 부분부분 저장돼있었고 여러 메신저에서 나랑 얘기하던 사람들의 프로필이 차곡차곡 다 복원됐다.

결국 나는 내가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정보를 그 사람들 모르게 복원해 갖게 된거다.

이건 그래도 내 폰이었지만, 대부분의 업체에서 문자 복원, 통화목록 복원, 아니면 메신저 대화 복원같은 서비스까지 하고 있기 때문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정보는 복원되고 기록될 지 모른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사람은 내가 그 사람의 프로필의 변화를 다 가지고 있다는 걸 모르겠지. 인스타에서 내가 본 모든 사진이 저장돼면서 내가 팔로우한 사람의 개인적 사진도 다 복원됐다.

결국 무작위로 복원시키는 이 기술 덕분에 나는 지금도 어디선가 복원돼고 있을지 모른다. 이렇게 엄청난 세상에 살고 있는데 이 기술은 점점 더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개인의 정보가 '개인 정보'가 個人이 아니라 開人정보가 된거다.





파리 사진이 복원 됐는데.... 2016년 5월이 아니라 2015년 5월이다. 결국 이 사진은 증발해버렸고 나는 내가 알거나 모르는 사람들의 무수한 사진과 내 돈, 삼성페이를 맞교환했다. 그냥 잃은 건 잡지 말고 Let it go해야 했다.

더 웃긴 건 2015년에 본 그림인데도 2016년에 하나도 기억 못하고 "이런 건 처음이다"라고 일기를 썼다는거다. 그니까 처음 봤다 이러면서 오오오 했지만 난 이걸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반복했다. 그림을 보고 내가 뭔가 달라지거나 미적 감각이 엄청나게 늘지 않는 이유인건가. 


이 일을 계기로 사진보다 직접 쓰고 보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이번 주말부터 동네 문화센터에서 뎃생을 배우기로 했다. 기록해서 붙잡고 있다는 게 우습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젠 정말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기록을 하고 싶다. 

Tuesday, May 24, 2016

여행 준비

1. 
이번 여행은 많이 무모했다.

엄마아빠를 일본 보내드리고서 나도 뭔가 비행기를 타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한 40퍼센트 정도는 차 있었지만 그래도 작년처럼 또 그런 '미친 짓'을 할 순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번에는 참자 참자...했다. 

이상하게 평소에는 잘 참다가 생일 즈음이 다가오면 혼자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맹렬하게 든다. 광저우-파리-베를린-파리 이렇게 몇 번을 혼자 지내고 나니까 더더욱. 이번에는 조용히 집에서 혼자 보내봐야지 했는데.


2.
시험에서 바라던 결과가 안 나왔다. 할일이 없어 책을 열심히 읽었다. 화집도 봤다.

우연히 사진을 보다가 피카소 그림을 봤다. Massacre in Korea (신천에서의 학살?)
스트라이프를 입고서 고집센 눈을 한 할배가 'I don't seek, I find'라고 말하면서 나보고도 발견하라고 부추기는 것 같았다.
작년 이맘때 이 그림을 보고 두근댔던 게 기억났다. 다시 보고 싶었다. 그리고 바르셀로나-말라가-파리를 가기로 했다. 오직 피카소 뮤지엄을 보려고. 니스쪽에도 하나 있는데 작년에 니스-칸을 갔을 때 도시 인상이 별로라서 거기는 뺐다. 

마드리드에서 게르니카도 볼까 했는데 스페인에서 너무 늘어질 것 같아서 그냥 바르셀로나-말라가로 만족하기로 했다. 게르니카는 마드리드에 있을 때 네 번이나 봤으니까 아직은 괜찮다 하면서 다음 여행(은 이미 확정된 것)으로 미뤘다.

일본에 있는 엄마아빠한테도 거의 '카톡통보'로 "나 여행가" 라고 보내고는 여행을 질렀다.


2.
5월 5일

비행기표를 찾다보니까 중국항공사 제외하고, 영국 랜딩만 아니면 유럽가는 건 80이 적정선이 된 것 같다. 마지막 비수기인데다가 직항도 아니니 딱 이정도면 준수하네 하고서 BA로 끊었다. 
돌아오는 게 새벽 비행기라 공항 노숙을 해야할까 싶었는데 뭐 그건 어떻게 되겠지 하고 우선 질렀다.

Barcelona in- Paris Out, (transfer at LHR)

5월 6일
바르셀로나 숙소를 예약했다. 난생 처음 '호텔'로 여행을 간다. 세상 좋아졌다.... 돈 없다고 24인실 호스텔 쓰던 내가 5년도 안돼서 호텔이라니! 출장때는 몇 번 가봤지만, 그래도 혼자만의 여행에서 호텔을 쓴다는 게 좋았다. 별 두개짜리 그닥 비싼 호텔은 아니었어도 혼자 방에서 뒹굴뒹굴할 생각을 하니 이베리아반도 공포증도 좀 사그라들었다.

말라가는 숙소가 호텔은 죄다 바닷가 근처고 시내 중심은 내 버짓을 너무 넘어섰다. 어쩌나..다시 원래대로 호스텔을 예약했다. 

파리는 자주 가던 수도원 호스텔로 가기로 했다. 3박을 하니 예약이 안되는데 2박+1박으로 쪼개서 넣어보니 됀다. 오 야-르. 아침마다 에펠탑 앞에서 산책해야지 하는 기쁜 마음으로 또 예약을 마쳤다. 
공항 노숙을 하면 분명 돌아와서 사나흘은 누워 골골댈 것 같아 마지막 밤은 샤를 드골 근처의 호텔을 에약했다. (이 호텔 절대 하지 말라고 나중 글에 꼭 써야지. 정말 아휴.....ㅋㅋㅋㅋ)

5월 7일
이동하는 비행기 예약을 마쳤다.
피치 못한 사정이 있을 때만 타는 '피치 항공'보다 더 싫은 '라이언에어'를 한 번 타야한다는 게 좀 싫었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돈 더 주고 좌석배정+짐 패키지로 했으니 좀 낫겠지. 

에어 유로파는 LCC인것 같은 데 스카이 팀이었다. 라이언에어로 좌석배정+짐 패키지 했을 때보다 한 10유로정도 비싼데 스카이팀 마일리지, 기내 음료까지 생각하면 이게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환전은 인터넷으로 하고 공항에서 받기로 했다. 위비톡인가 광고에서 막 나오던 걸 처음 써봤는데 나쁘지 않다? 면세 적립금을 친구들한테 퐁퐁 나눠주면서 인심도 썼다. 


3. 
여행 준비는 가서 하기로 했다.
바르셀로나에는 피카소 뮤지엄이 하나, 말라가에는 두 개 (Fundacio & Museo 이렇게 있음), 그리고 마레 지구의 피카소. 이거만 가면 되고 나머지는 알아서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짐만 쌌다.

28리터짜리 캐리어를 들었다가는 욕하면서 올 게 뻔해서 20리터로 했는데. 그래도 여전히 욕은 했다. 샹젤리제에서 리무진 타러가면서 "내가 다신 오나봐라" 이러면서 멍청하게 사재낀 나를 원망하면서.

Monday, May 2, 2016

식신 (食神, The God of Cookery, 1996)


1
코미디 장르에서 가장 중요한 건 힘주지 않는 거라고 생각한다.
너무 힘을 줘서 세게 말하면 갑자기 사회극이 되어버리고, 또 너무 힘을 줘서 수위가 높아지면 싸구려가 돼버린다. 막 웃기게 치고 달리다가 툭 하고 빠지는 그 지점에서 웃음을 터지게 만들어야 다시 봐도 웃긴 장면이 나온다. <듀 데이트>나 <쥬랜더>같은 영화들이 다시 봐도 웃긴게 배우들이 정색하고 '난 웃기려고 하지 않아' 하고 미친 짓을 해대다가 어느 순간에 툭 끊는다. 그래서 터진다.

2.
주성치 영화는 어이없게 치고 달리다가 그 앞에서 툭 하고 끊어지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이 돼면 내가 이거 왜 웃지? 하고 웃다가 나중에 다시 생각하면서 또 웃는다. 멋있는 척을 하는 것 같다가도 '어 이거 아닌데?' 하면서 되게 어이없는 말과 액션을 보여준다. 성룡이 그 어이없는 상황에서 아뵤 하면서 정의의 사도로 일어난다면 주성치는 '에이' 하면서 슬그머니 뒤로 빠지면서 살짝 훅을 날리는 스타일이랄까.

3.
주성치가 식신에서 쫓겨나게 된 계기도 엄청난 음식이 아니라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잡탕면때문이고, 다시 올라서게 된 것도 오줌싸개 완자다. 엄청나게 대단한 음식이 아니라 그냥 정- 말 홍콩 길거리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은' (요즘은 이런 음식 찾기도 힘들다. 우리나라에서 포장마차가 쉽게 안보이는 것처럼) 음식으로 천당과 지옥을 오고간다. 정말 온몸으로 (콧소리를 홍홍 내면서) '헝-거엉'을 외치는 영화다. 소림사도 성룡이나 이연걸이 보는 것처럼 그렇게 신성한 공간도 아니고. 영화에서 주성치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한다.

4.
캣스트리트도 이젠 조악한 관광객 시장으로 변해버렸지만, 그래도 이 영화 안의 猫街는 강호의 도와 형제의 의리가 있다. 영화 느낌이랑 비슷한 곳을 찾으려면 캣스트리트보다는 오히려 야우마테이 뒷골목이 더 닮았다. 학교 다닐 때 자주 갔던 Mr.Wong도 뒷골목 사람이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 가게 있는 골목이랑 비슷한 느낌? 음식도 딱 저 수준이었으니.

5.
막문위는 거의 '강호의 도가 바닥에 떨어졌다'를 온몸으로 보여주면서 의리를 지키는 모습으로 나오는데, 알고보니 그게 義가 아니라 愛였다는 장면에서 한 번 웃겼다. 사랑밖에 모르는 나는 여자이니까....의 실사판이랄까. 

원래 예쁜 언니라 그런지 망가지는데 별로 두려움이 없었나보다. 젊은 여배우가 저런 분장하고 저런 역할 하기는 쉽지 않았을텐데. 그리고 애인이 감독이라 그런지 그렇게 추녀 분장을 해도 사랑스럽다. 특히 주성치를 잡으려고 아이섀도우 빡 하고서 눈 껌뻑이면서 나오는데 이게 그냥 일반적으로 찍었으면 으잉 이랬을텐데 사랑하는 마음으로 찍었을테니 '못생겼지만 귀엽다'. 마냥 예쁘게 나오던 열애상흔때보다 여기서 더 매력적이다.

6.
캔토니즈 영화는 자막이 안맞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번에도 1달을 1년이라고 하고, 대화 장면에서 약간 뉘앙스가 틀린 부분이 있었는데. 캔토니즈를 다시 시작해볼까 하다가도 쌓여있는 hsk 책을 보면서 저거나 하자 하고 책을 덮었다.

7.
내쫓기고 매맞던 주성치가 막문위한테 챠슈덮밥을 받아들고 '너무 맛있어' 하면서 허겁지겁 먹는데 그 마음이 1000000000000% 와닿는다. 다시 돌아가서 챠슈를 먹고, 커리를 먹어도 그때 그 맛이 안 느껴지는 건 내가 그때보단 마음이 덜 힘들어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