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September 21, 2016

덕혜옹주 (The Last Princess, 2016)

1.
국사를 공부하면서 '명성황후는 이미연이 아니다'를 외친 것처럼 이 영화를 볼 때는 '덕혜옹주는 손예진이 아니다'를 반복하고 시작해야 한다.

손예진이 아무리 눈물을 뚝뚝 흘리고 처연하게 쳐다보더라도 "저건 사실이 아니다" 라고 손예진 매직에 걸려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2.
마지막 황녀라는 게 주는 신비감, 안타까움은 명운을 다한 나라에는 꼭 하나씩 있는 것 같다. 제정 러시아의 아나스타샤도 그렇고, 엘리자벳도 있다. 성별은 다르지만 청의 푸이도 그랬고.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우 왕자 얘기는 삼일절이나 광복절 즈음만 하면 인터넷에 꾸준히 올라오고 있다.

덕혜옹주는 소설로도 나와서 꽤 인기를 끈 걸로 안다. 망한 나라의 고명딸 얘기니 얼마나 짠하고 슬플까.


3.
영화 보는데 내가 알던 허진호 감독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내내 갸우뚱했다. "라면먹고 갈래요?"라는 희대의 캐릭터를 만들었던 감독인데, 왜 이렇게 빤한 얘기만 하고 있는거지.

여기서 주인공은 여자지만, 전형적인 '공주마마', '핑거프린세스'다.

1919년 첫 씬부터 아기씨는 아바마마와 대신들이 있는 곳을 뛰어다닌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귀여운 내 딸',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막내'라는 이미지를 강조하고 싶었는데. 그래도 옹주인데 저렇게 상황파악이 안됐을까. 왕족이 가져야 할 규범 대신 전형적인 '막내 딸' 이미지가 이겼다.

영화에서 덕혜옹주는 아무 것도 아니다. 독립 운동가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친일파도 아닌 정말 방관자, 투명인간처럼 보인다.

물론 손예진은 연기를 잘한다. 연애시대에서 보여줬던 등으로 우는 것 같은 느낌이 여기서도 나온다. 비슷한 시기에 <비밀은 없다>가 개봉했는데 거기서는 빡 힘주고 날 세워서 연기했다면 여기서는 누르고 눌러서 '한국의 정한이 애이불비'의 감정을 표현했다랄까. (아 이 말 진짜 싫어하는데) 근데 나머지 배우들도 연기를 잘해서 덕혜의 존재감이 두드러진다거나 이런 건 없다. 소설을 안 읽어서 모르겠는데 원작에서도 이렇게 그냥 아무런 존재감없고 관찰자로만 나오는 지 궁금하다. 영화에서 덕혜옹주가 그나마 능동적이었던 건 한글학교를 만들고, 연설 장면 정도?


4.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살고 있는데도 여전히 '옹주마마' 하면서 무릎꿇고 큰절했을까도 의문이며, 아나키즘 혁명 계열들이 과연 앙시엥 레짐의 잔재인 '옹주'라는 존재를 환영했을까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덕혜옹주가 주가 돼야 할 영화에서 왜 애써서 이우 왕자의 영웅적인 면모를 끌어올렸는지도 모르겠고 (심지어 사실도 아님), 그에 반해 오빠인 영친왕은 너무 일본 만화캐릭터에서 주인공 옆 배경3정도로 나올 인물같은 캐릭터로 나와서 별로였다.

김장한이라는 충성심 넘치는 정혼자의 끝을 모르는 사랑도 음? 싶었다. 한택수라는 인물도 너무 전형적인 '악한' 일본인으로만 나와서 과연 저랬을까? 너무 스테레오 타입들을 두 시간동안 꽉꽉 눌러담아서 빤하고 빤한 영화같았다.

물론 이해로 영화를 보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팩트인 척 하면서 픽션만 남아있는 팩'션'의 경우에는 저런 '픽션', 그러니까 역사적 가정이 과연 무슨 효과가 있으며 왜 저러는 건지 의아하게 된다.

일본이랑 관계가 삐걱대면서 일제강점기 얘기를 다룬 영화들이 많다. 암살도 있고 밀정도 있고. 이 영화는 팩트보다는 그냥 이 시기의 안타까운 설정만 남고, 정말 그 시대에 대한 어떤 의미를 뒀는지 전혀 이해가 안된다. 이 영화랑 비교하기에는 앞의 두 영화가 아니라 그냥 그 시대 분위기만 따온 '아가씨'같은 영화랑 비교하는 게 오히려 더 적절한 것 같다.


5.
손예진은 정말 미친듯이 연기를 잘한다. 영화에서 원래 이렇게까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여기서 정신병자처럼 울부짖는 장면에서는 깜짝 놀랐다.

남자 쎈 캐릭터 위주로 돌아가는 한국 상업영화판에서는 힘들겠지만, 이렇게 갈대같이 연약하고 힘없는 주인공이 아니라 뭔가 쎄거나 고집있는 역할로 한 번 보고 싶다. (연애시대같은 어른느낌 나는 주인공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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