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암스테르담 여행에서도 어김없이 걷고걷고 걸었다.
먹는 건 대충 길거리에서. 레스토랑에 간 게 딱 한 번. 공항 오고갈 때를 제외하면 버스는 단 한번도 타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살은 좀 빠져온 듯한 느낌도.
빈센트 반 고흐, 고갱, 램브란트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건 CoBrA라는 새로운 학파. 코펜하겐, 브뤼셀, 암스테르담의 약자라고. 느낌있는 그림이나 아티스트들이 많아서 검색하면 왜 자꾸 뱀이 또아리를 틀고 나타나는걸까.
암스테르담에서도 사이트는 확인했고 암스테르담에서도 계속 업무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짓눌렀다. 와이파이가 콸콸콸 터지는 박물관에 들어설 때마다 업무메일을 체크했고 안나랑 인터뷰 프로세싱 확인만 했다. 이게 뭐지, 난 휴가였는데. 머리가 맑아지다가 다시 탁해지다가를 반복했던 5일.
그래도 더 스테일 작품도 많이 보고 어느 정도 내 인생에 대한 방향은 잡은 것 같다.
2.
첫 미팅에서 느낌이 좋았는데 일도 재밌고 우선 내가 존중받는 느낌이라 좋다. 바쁘다고 하지만 채근대지 않고 내 일을 인정해주는 느낌. 내가 하는 일은 롱리스트 작성에서 숏리스트, 그리고 내 코멘트를 덧붙이는 것. 지난주에 업무를 시작하자마자 벌써 세 편을 썼다. 그 중에 하나는 영화는 영화다. 평소같았으면 꽤 흥미로운 영화였을 것 같은데 피곤한 상태여서 그런지 그냥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나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영문 시놉시스가 영화 공홈에 엉망으로 되어있는 게 꽤 많아서 영진원 사이트에 앞으로 매일 들어가야 할 것 같다.
3.
그리고 화요일 미팅에서 앞으로 프로베션(수습?) 끝내고 이제 퍼머넌트 정식 계약하자는 오퍼를 받았다.. 나이라는 내가 이런 소식에도 안웃어서 조금 당황한 듯 했다. 그 얘기를 듣고 그냥 나는 '음 고마워. 근데 이거 내가 작성한 기획안인데, 좀 봐줄래?'하면서 2주전에 자료 뒤져가며 만든 보고서를 제출했으니.
감정표현이 많은 편인데 그때는 왜 그렇게 덤덤했을까. 나이라는 내가 그동안 다른 팀멤버들도 많이 도왔고 아이디어도 좋았고 마켓 크기에 비해 꽤 좋은 수치를 내고 있다고 칭찬해줬다. 앞으로 좀 더 많은 편집권이나 제작권한 준다고 엄청난 기회라고, 내 안에 더 많은 걸 보여달라고 그러는데 듣는 순간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처럼 띵했다. 내가 뭘했던거지? 내가 뭘 더 해야하지? 그리고 내가 더 여기 살아야하는건가?
물론 그동안 업무가 좋은 평가를 받았으니 기분은 좋았지만 갑작스레 외국 생활이 더 길어지게 된다는 생각을 하니 무섭기도 했다. 나는 이 나라에 뼈를 묻을 생각이 전혀 없는데? 그리고 내 전공은 마케팅도 아닌데 지금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갑자기 회의 아닌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4.
그러던참에 맷이 와서 마음의 안정이 좀 됐다. 오랜만에 홍콩에서처럼 하루 두 탕 영화도 보고 (영화를 보고 온 사이 집의 인덕션이 사라졌다!) 집에 와서는 맥앤치즈+맥주에 밤새 얘기도 하고.
맷은 내가 너무 지레 겁먹고 걱정하는 게 아니냐고 그랬다. 음, 내가 그랬나? 맷은 내가 '이구역의 짱미친년'이었을 때 봤으니 지금의 내가 어색할수도.
5.
예전의 나는 겁없고 그냥 무턱대고 들이댔다면 요즘은 재고 먼저 고민하고 먼저 끙끙대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결국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텐데. 세상의 모든 일이 저절로 해결되는 게 아니라 내가 다시 움직이고 부딪히며 그 과정이 결국 다시 내 삶의 한 부분으로 돌아온다는 걸 배우고 있다. 아 지금 뭐라는거지? 졸려서 머릿속에 생각하는 말이 자꾸 엉키네.
6.
안나한테 메일을 보내서 내가 지금 사정이 이렇게 됐는데 메일로 집에서 일해도 되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원래는 안되지만 나를 잡고 싶으니까 예외적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이제 wanted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라 어느 정도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는 말이 더 실감난다.
6.
학부모들은 어느 나라나 다 똑같구나.
7.
여하튼 너무너무 바쁘고 피곤하다. 월요일 여덟시 십삼분 기차를 타며 시작한 한 주가 토요일 일곱시 사십오분에 마감. 그리고 내일 열한시면 또 다시 경기. 이 생활을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이나라에 와서 남자복은 없어도 일복은 아주 터지는구나.
도비는 양말을 받기 전까지 노예입니다. 그렇다면 내 양말은 언제쯤?
암스테르담 여행에서도 어김없이 걷고걷고 걸었다.
먹는 건 대충 길거리에서. 레스토랑에 간 게 딱 한 번. 공항 오고갈 때를 제외하면 버스는 단 한번도 타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살은 좀 빠져온 듯한 느낌도.
빈센트 반 고흐, 고갱, 램브란트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건 CoBrA라는 새로운 학파. 코펜하겐, 브뤼셀, 암스테르담의 약자라고. 느낌있는 그림이나 아티스트들이 많아서 검색하면 왜 자꾸 뱀이 또아리를 틀고 나타나는걸까.
암스테르담에서도 사이트는 확인했고 암스테르담에서도 계속 업무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짓눌렀다. 와이파이가 콸콸콸 터지는 박물관에 들어설 때마다 업무메일을 체크했고 안나랑 인터뷰 프로세싱 확인만 했다. 이게 뭐지, 난 휴가였는데. 머리가 맑아지다가 다시 탁해지다가를 반복했던 5일.
그래도 더 스테일 작품도 많이 보고 어느 정도 내 인생에 대한 방향은 잡은 것 같다.
2.
첫 미팅에서 느낌이 좋았는데 일도 재밌고 우선 내가 존중받는 느낌이라 좋다. 바쁘다고 하지만 채근대지 않고 내 일을 인정해주는 느낌. 내가 하는 일은 롱리스트 작성에서 숏리스트, 그리고 내 코멘트를 덧붙이는 것. 지난주에 업무를 시작하자마자 벌써 세 편을 썼다. 그 중에 하나는 영화는 영화다. 평소같았으면 꽤 흥미로운 영화였을 것 같은데 피곤한 상태여서 그런지 그냥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나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영문 시놉시스가 영화 공홈에 엉망으로 되어있는 게 꽤 많아서 영진원 사이트에 앞으로 매일 들어가야 할 것 같다.
3.
그리고 화요일 미팅에서 앞으로 프로베션(수습?) 끝내고 이제 퍼머넌트 정식 계약하자는 오퍼를 받았다.. 나이라는 내가 이런 소식에도 안웃어서 조금 당황한 듯 했다. 그 얘기를 듣고 그냥 나는 '음 고마워. 근데 이거 내가 작성한 기획안인데, 좀 봐줄래?'하면서 2주전에 자료 뒤져가며 만든 보고서를 제출했으니.
감정표현이 많은 편인데 그때는 왜 그렇게 덤덤했을까. 나이라는 내가 그동안 다른 팀멤버들도 많이 도왔고 아이디어도 좋았고 마켓 크기에 비해 꽤 좋은 수치를 내고 있다고 칭찬해줬다. 앞으로 좀 더 많은 편집권이나 제작권한 준다고 엄청난 기회라고, 내 안에 더 많은 걸 보여달라고 그러는데 듣는 순간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처럼 띵했다. 내가 뭘했던거지? 내가 뭘 더 해야하지? 그리고 내가 더 여기 살아야하는건가?
물론 그동안 업무가 좋은 평가를 받았으니 기분은 좋았지만 갑작스레 외국 생활이 더 길어지게 된다는 생각을 하니 무섭기도 했다. 나는 이 나라에 뼈를 묻을 생각이 전혀 없는데? 그리고 내 전공은 마케팅도 아닌데 지금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갑자기 회의 아닌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4.
그러던참에 맷이 와서 마음의 안정이 좀 됐다. 오랜만에 홍콩에서처럼 하루 두 탕 영화도 보고 (영화를 보고 온 사이 집의 인덕션이 사라졌다!) 집에 와서는 맥앤치즈+맥주에 밤새 얘기도 하고.
맷은 내가 너무 지레 겁먹고 걱정하는 게 아니냐고 그랬다. 음, 내가 그랬나? 맷은 내가 '이구역의 짱미친년'이었을 때 봤으니 지금의 내가 어색할수도.
5.
예전의 나는 겁없고 그냥 무턱대고 들이댔다면 요즘은 재고 먼저 고민하고 먼저 끙끙대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결국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텐데. 세상의 모든 일이 저절로 해결되는 게 아니라 내가 다시 움직이고 부딪히며 그 과정이 결국 다시 내 삶의 한 부분으로 돌아온다는 걸 배우고 있다. 아 지금 뭐라는거지? 졸려서 머릿속에 생각하는 말이 자꾸 엉키네.
6.
안나한테 메일을 보내서 내가 지금 사정이 이렇게 됐는데 메일로 집에서 일해도 되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원래는 안되지만 나를 잡고 싶으니까 예외적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이제 wanted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라 어느 정도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는 말이 더 실감난다.
6.
학부모들은 어느 나라나 다 똑같구나.
7.
여하튼 너무너무 바쁘고 피곤하다. 월요일 여덟시 십삼분 기차를 타며 시작한 한 주가 토요일 일곱시 사십오분에 마감. 그리고 내일 열한시면 또 다시 경기. 이 생활을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이나라에 와서 남자복은 없어도 일복은 아주 터지는구나.
도비는 양말을 받기 전까지 노예입니다. 그렇다면 내 양말은 언제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