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단어를 처음 접한 건 아마 이순재 할아버지 인터뷰에서 김태희에 대해 얘기하면서 "이해할 수 없거나 경험할 수 없는 계급적 한계"가 있다고 말한 대목에서였다.
처음에는 저 할배가 노망났나, 왜저래? 이랬는데 요즘 와서 제일 실감하는 게 바로 이 대목이다. 특히나 문화적 경험의 측면에서 계급적 한계는 경험소비에 대한 태도 차이로 나타나는 것 같다. 박물관 6유로가 아깝다거나 새옷을 일부러 태그를 떼지 않고 입다가 환불하는 걸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박물관, 미술관이 보고 싶고 일광욕과 클러빙보다는 그늘진 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싶었다. 대도시 지식중산층의 계급적 한계라고 하면 나의 오만함인건가. 이런 걸 일반화할수는 없겠지. 이거야 말로 부모 돈으로 배부른 소리 하는 철없는 투정으로 보이기 쉽겠다. 하지만 부르튼 손, 대량생산된 스파 브랜드 옷들(물론 한국에서 내가 명품족은 아니었다만), 책 한 권 읽을 나만의 공간이 없는 상황. 아마 이런 게 지금 나를 더 힘들게 하는 걸지도.
처음에는 저 할배가 노망났나, 왜저래? 이랬는데 요즘 와서 제일 실감하는 게 바로 이 대목이다. 특히나 문화적 경험의 측면에서 계급적 한계는 경험소비에 대한 태도 차이로 나타나는 것 같다. 박물관 6유로가 아깝다거나 새옷을 일부러 태그를 떼지 않고 입다가 환불하는 걸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박물관, 미술관이 보고 싶고 일광욕과 클러빙보다는 그늘진 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싶었다. 대도시 지식중산층의 계급적 한계라고 하면 나의 오만함인건가. 이런 걸 일반화할수는 없겠지. 이거야 말로 부모 돈으로 배부른 소리 하는 철없는 투정으로 보이기 쉽겠다. 하지만 부르튼 손, 대량생산된 스파 브랜드 옷들(물론 한국에서 내가 명품족은 아니었다만), 책 한 권 읽을 나만의 공간이 없는 상황. 아마 이런 게 지금 나를 더 힘들게 하는 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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