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August 2, 2018

변산 (Sunset in My Hometown, 2018)

1.
음악방송이나 서바이벌을 안 좋아해서 온나라가 힙합 드랍더비트 열풍에 쿵기적댈 때도 나만큼은 여기에 휘둘리지 않고 있었다. 딘이랑 딘딘이랑 다르다는 걸 최근에 예능보고 알았다. 서른이 넘어가니 새로운 음악을 듣는 것도 싫어서 플레이 리스트에는 여전히 2000년대 초반 노래로 가득하다. 나에게 마지막 랩퍼는 김진표였는데 엠씨를 보고 있더라?

2.
변산은 2000년대의 플레이리스트에 쇼미더머니를 끼워맞춘 듯한 느낌이 든다. 라디오스타에서 본 것 같은 음악으로 하나되는, 음악과 함께 음악에 녹여 소박한 마을의 아름다움에 진심의 변두리에 서있는 (실제로 나오는 가사)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다!

이게 이준익 감독의 목표였던 것 같은데.

내가 이제 옛날사람이라 그런가, 사실 랩의 절반은 알아듣지 못했다. 뭐 저게 오오 할 부분인가? 랩이 저게 좋은거야? 이렇게 따지다보니 영화는 흘러가고. 랩 배틀이라는 장면도 뭔가 오글오글. 사실 이래서 음악영화는 썩 안좋아하는데.

문제는 모국어로 랩을 알아듣는 나한테도 이런데, 외국 사람들한테는 이게 그냥 염불로 들릴 수도 있다는 거다. 나랑 비슷하게 이 영화를 본  동료도 랩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이 영화가 와닿지 않았다고 코멘트했다.

랩 자체에서 감동을 전달하기 힘들다면, 랩에 담긴 라임이나 언어적 기교까지 섭으로 번역해서 '자막의 라임'을 만들어야 했을 것 같은데, 그냥 번역이어서 아쉬웠다. 나름 노력해서 짠 가사일텐데 영어로 퉁치니까 그냥 10대의 일기장같은 느낌?

그리고 사투리를 쓰다보니 이놈의 시끼, 야이 자식아 이렇게 다양한 비속어들이 오고가는데, 사실 시끼와 자식아, 이놈~ 이걸 일괄적으로 bastard로 통일하고, 사튈의 아우 그라씅께~ 뭐 이런 말들을 다 damnit으로 퉁치다 보니 자막만 보면 이 영화는 R이다.

영화 번역을 할 때 damnit이랑 darn it, darn 이런 식으로라도 수위 조절은 해야 자막이 더 와닿지 않을까. 모든 사람이 damn하는데 감정이 그렇게 크게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무덤덤하다. 이건 뭐 느와르....?


3.
언제까지 시골=순박함, 도시=성공 하지만 결국 나는 작은 내 고오향이 조와아~ 이 감성이 통할까 싶고.

전북 부안이 그렇게 시골인가...그 와중에 미경이네 집은 갑자기 서래마을 감성처럼 보여서 영화 내부에서 살짝 튀는 느낌.


4.
영화 속에서 박정민은 집 근처에서 랩한다고 마이크 하나 들고 지나다니는 사람 닮았다. 전형적인 홍대 죽돌이 스타일. 상수동은 아니고 저기 합정역 3,4번 출구나 서교동쪽에서 자주 보이는 스타일. 영화에서 여전히 귀여웠고 재밌었는데, 다음번에는 다시 진지한 역할 한 번만 해주면 좋겠다.

김고은 노래방 장면 보고서 범계역 데몰리션 노래방에서 목청껏 질러대던 과거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같이 울부짖던 친구들은 지금 뭐하고 살려나.


5.
진심의 변두리. 이 단어 하나가 자꾸 입에 멤돈다. 요즘 메마른 느낌에 자꾸 정면은 아니고 주변에서 멤돌고 딱 9할의 삶을 사는 느낌이었는데 이 단어가 딱 그걸 요약한 것 같다. 

Wednesday, August 1, 2018

만비키 가족 (Shoplifters, 2018)

1. 자본주의 체제 속 개인 삶의 파괴라는 주제는 이제 한 특정 국가에서만 나오진 않는다. '헬조선 종특'이라고 일컬어지는 문제들은 데칼코마니는 아니더라도 그라데이션으로 전 세계에서 나타난다. 흙수저, 레이버, 챠브, 레드넥, 뭐 어떻게 부르던간에 돈 없는 사람들 문제가 한국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거다.

2. '만비키 가족' 은 일본에서 가족 시스템이 파괴되면서 나타나는 현 사회의 모습을 담았다. 유교 영향권에서 家는 國家였고, 결국 기존 가족 체계의 파괴는 사회의 붕괴다. 이런 측면에서 비슷하게 떠오른 영화가 진부하지만 '나, 다니엘 블레이크'나 '플로리다 프로젝트'. 좋은 사람과의 연대(다니엘-케이티), 개인의 노오력 끝에 자기파괴(케이티-무니), 그리고 만비키 가족은 기존에는 없지만 특이한 '가족'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 결국 각 문화권 특징대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게 영화에서도 보이는데, 나한테는 가족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 영화가 가장 힘들고 버거웠다.

3. 영화에서 가족의 탄생은 선택적이다. 기존 가족이 혈연이라는 '운명'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이 가족은 개인의 의지에 의해 탄생한 조합이다. 가장 어린 린조차 자신의 오빠와 보호자를 선택하고, 이름을 바꾼다. 어쩌면 '가족'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이 조합은 서로를 부르는 호칭에서도 드러난다. 아저씨도 아니고 아빠도 아닌, 엄마도 아니고 아줌마도 아니지만 그게 무엇이건 상관없는 공동체. 생존을 위해 뭉쳐서 생존 그 이상의 관계를 맺은 이 관계는 기존 가족 시스템으로 보았을 땐 '유괴', '복지 도둑'으로 보일 수 있다. 할머니의 죽음을 알리지 않는 건 그 할머니의 '연금'이 필요해서였고, 아이를 돌려보내지 않아도 '몸값'을 요구하지 않았으니 범죄가 아니라는 얘기다. 오히려 이를 따지는 경찰을 보여줄 때 '제도가 가지는 헛점'을 대변하는 위치로 그리려고 하는데. 이 영화에서 가장 불친절하게 그려지는 것은 경찰과 제도. 그리고 그 제도를 악용하는 빨래공장 동료같은 사람들이다.

4. 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건성피부, 건조한 목소리라서 득 보는 영화라고 말하곤 했다. 영화를 같이 본 친구는 "어떤 인물에도 동감가긴 어렵다"라고 했다. 나는 그게 이 감독의 힘이자 특징인 것 같다. 한 인물에 빠지게 되면, 그냥 그 인물에 대한 '판가름'으로 끝이 나고 사건은 단편적으로 끝난다. 관조적인 시선, 대상과의 거리두기, 이렇게 한 인물에 빠지는 걸 감독이 적극 방어해나가면서 오히려 덤덤하게 전체 사건을 볼 수 있게 한다. 사실 이 영화에서 기존 사회적 통념에 비추었을 때 '제대로 된' 건 하나도 없지 않나. 나같은 꼰대가 삐딱하게 보는 걸 막고 한 번이라도 더 생각해보라고 설득하기 위해 감독은 계속 거리를 두고, 인물보다 전체 그림을 보여주려고 애를 쓴다. 이번 영화에서는 여름의 이미지까지 더해가면서 자칫하면 '막장'이 될 수 있는 이 얘기들을 잘 희석시킨다. 우악스럽지 않은 막장 - 멀리보면 예쁜 희극인데 가까이서 보면 처절한 비극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5. 이 영화에서는 먹고 먹고 또 먹는다. 국수를 먹고, 라면을 먹고, 고로케를 먹고 음료수도 마시고. 먹고 사는 문제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과하다 싶을 정도로 끊임없이 먹는 장면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먹는 것은 대부분 개인의 욕구에 의한 선택이 아니라 기본 생존 수단에 그치고 있다. 영화에서 밀개떡을 먹고 싶어도 제대로 표현 못하는 린의 표정, 도득질을 해서 '먹는다'라는 카테고리 안에만 들어가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걸까? 쇼타가 일부러 잡힌 것도 이렇게 먹고는 살지만, '먹고 사는데에만 그치는' 삶을 동생 린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고민에서 시작됐다. 이 생각을 하다보니 우리나라에서도 수급자 애들이 감히 '돈까스'를 먹냐고 난리났다는 얘기가 생각나기도 했다. 가난하면 욕구조차 단순하게 채워넣어져야 한다는 믿음.

6.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와서. 유럽과 미주에서도 이런 사회 문제를 제기하는 영화가 나왔다. 그러면 왜 우리나라는 여기에 꼽을만한 사례가 없을까? 우리나라의 영화산업이 대기업의 자본에 잠식당해서? (GAGA, BBC를 마이너로 볼 수 있나?) 멀티플렉스에서는 인랑이랑 신과 함께만 틀어줘서? (CGV에서 노무현입니다랑 이상호 영화 한동안 주구장창 틀어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