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ugust 20, 2017

천수위의 낮과 밤 (天水圍的日與夜, The Way We Are, 2008)

1.
천수위라고 하니까 어디지 했는데 한자를 읽어보니 아 틴수이와이~

위엔롱에서 쫌 더 올라가면 있던 습지 공원 있는 동네라는 기억밖에 안난다. 사실 가보지도 않았다. 고작 1년 채 안되는 기간에 홍콩의 모든 동네를 다 돌아볼 수도 없고, 홍콩에서 그렇게 중요한? 곳은 아니라 가볼 일도 딱히 없다.

서울을 아무리 살아도 저기 중랑천을 걸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테고, 은평구 끝자락이나 금천구 끝자락을 안가본 사람도 있을테니까.

뉴 테리토리는 딱 그런 동네였다. 중국 넘어가기 전 지나가는 동네,  "중국에서 홍콩으로 넘어온 이민자 공용 주택이 밀집한 지역"이라고 설명돼 있고, 레드 하우스가 아니었다면 나도 굳이 찾아가진 않았을 동네다.

2.
천수위의 낮과 밤은 이상적인 홍콩 로컬의 모습을 보여준다.
홍콩하면 금융 허브, 외국인이 더 많은 곳, 국제 도시거나 아니면 침사추이 미라도-청킹처럼 보이는 아주 오래된 도시 이미지로 양분된다.

그런데 여기도 사람사는데라 이렇게 극단적이기보다는 중간의 쩜오같은 공간과 사람들이 더 많다. 로컬하면 생각하는 오래됨과 도시 하면 생각하는 화려함으로 양분하기 보다는 그냥 그 중간에서 보통 사람들은 먹고 자고 산다. 웡타이신이나 삼수이포로만 빠져도 생각보다 외국인 안보이고 영어가 잘 안통한다. 홍콩섬은 이런 지역이 적지만, 카오룽쪽은 올라가면 올라갈 수록 이런 동네가 흔하다.

영화가 촬영된 곳은 거의 다 틴수이와이고 주인공이 일하는 슈퍼도 시티나 m&s같은 느낌이 아니라 웰컴같다. 일본 홋카이도산 우유보다는 카오룽 우유 팔 것 같이 생긴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 영화에서 외국인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영어 이름을 쓰지 않고 캔토니즈 이름을 쓴다. 아침마다 차찬탱 딤섬을 먹는 게 아니라 비닐백에 담긴 아침을 사다가 먹고, 신문을 살 때는 꼭 파란색 티슈를 챙겨받는 사람들의 모습. 귀여운 캐릭터에 환장하고. 정말 홍콩 로컬이라면 이런 사람들 같다.

홍콩이라는 이미지에 떨어지는 장면보다는 이렇게 사람사는 곳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다보니 가장 멀리 빠진 곳은 샤틴이다. 샤틴은 뉴테리토리랑 카오룽의 경계같은 곳인데 관광객을 위한 호텔도 이 이상은 넘어가지 않는다. 뉴타운 플라자나 만불사, 이케아를 가기 위해 가는 사람이 드물게 있겠지만...

3.
기대하지 않았던 영화였는데 이번 특별전에서 두 번째로 좋았다. (제일 좋았던 영화도 역시나 허안화 감독의 심플 라이프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소박함이 구질구질함이 되지 않고, 착함이 호구가 되지 않는 시대였다. 남을 돕는 것에서 계산을 하지 않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고, 모자간에 대화가 흘러넘치지는 않았어도 적어도 서로의 말을 귀기울여 들을 수 있는 배려심이 남아있었다.

혼자 사는 할머니에게 일자리를 소개해주고 바로 일자리를 구할 수 있고 (지금 이건 기적과 같은 동화다), 이 할머니는 비싼 버섯을 선물하고 다시 고맙다며 금반지 은반지를 선물하는. 너무 착하고 고요하게 흘러가서 실제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모습이 판타지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4.
2008년까지만 해도, 그러니까 이 영화가 만들어질 즈음만 해도 세상은 이렇게까지 각박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1000유로가 한 세대를 지칭하는 단어가 될 줄은 몰랐고, 월가를 점령할 지도 몰랐다.

홍콩의 경우는 그 변화가 더 크다. 점점 더 중국의 영향력은 커지면서 뉴테리토리 슈퍼의 식료품이 다 사라지고, 집값이 폭등하고 우산을 들고 거리에 나서거나 피쉬볼을 던지면서 싸울 거라고 예상했을까? 아마 주인공 가온이 자랐다면 분명 우산을 들고 피쉬볼을 던지는 나이 또래였을텐데 착했던 그 주인공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5.
영화에서 본 착한 홍콩 사람들은 사실 홍콩에만 있는 건 아니었을거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이제 이게 변수가 아니라 상수가 된 것 같지만) 친절한 동네 가게 아주머니는 프랜차이즈 가맹비에 헉헉대는 점주, 운이 나쁘다면 그 밑에서 일하는 알바가 되었을지도 모르고.

영화가 좋았던 건 홍콩을 봐서가 아니라 (사실 내 홍콩에 대한 기억은 뉴 테리토리보다는 부자동네인 카오룽이라 조금 다르다) 따뜻했던 그 시절을 볼 수 있어서인 것 같다.

이걸 정이라고 포장하지도 않고, 극적 사건들을 만들어가며 억지 감동 감정과잉 서사도 없지만, 잔잔하게 흘러가는 러닝타임동안 착한 사람들이 착하게 살아가는 '이야기'가 좋았다.

6.
영화 제목은 원제도 마음에 들지만 영어 제목도 마음에 든다. 천수위 사람들의 낮과 밤, 그리고 우리가 사는 법. 특별할 건 없지만 낮과 밤이 흘러가면서 잔잔히 보이는 그 사람들의 모습이 제목에 잘 담겼다.


Thursday, August 10, 2017

첨밀밀 Comrades: Almost a Love Story (1996)

1.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고 피천득 선생은 썼다.

이 구절을 처음 본 건 교환학생 끝날 즈음. 돌아가는 것에 대한 불안함과 헤어지는 아쉬움때문에 매일을 나라 잃은 백성처럼 매일 술을 마셨다. 그러고 보니 나는 2011년에 이미 탈조선을 생각했던 거다.

나한테는 한 번 만난 것도 아니고, 다시 안 만나는 사이도 아니지만 항상 그리운 사람과 장소가 있다.


2.
첨밀밀을 볼 때마다 피천득 선생의 글귀가 겹쳐진다.

같은 마음이었고, 같은 장소에 있지만 자꾸 엇갈리는 둘을 볼 때마다 자꾸 "여기서 고개를 돌렸더라면", "그때 조금만 늦게 갔더라면", "그때 더 붙잡았더라면", 그런 생각을 해본다.

만약에 이교가 호출기를 받았더라면, 소군은 소정과 결혼하지 않았을거고, 이교가 대만행 배를 타지 않았더라면 멀리 떨어지는 일도 없었을 거고, 소군이 차찬탱 안에서 밖을 내다봤더라면 그 둘의 만남은 더 빨라졌을 수도 있다. 자전거를 탄 소군이 옆을 둘러봤더라면 간절히 내달리던 이교를 태워줄 수도 있었을 거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번의 엇갈림이 있었지만 만났다.
만날 사람은 만나는 거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가 막히게 극적으로 등려군 사망 방송이 나오는 가게 앞에서 만난다.

나는 이 때 여명의 표정이 제일 좋다. 살짝 떨떠름한 것 같은 표정 속에 너무 놀라지도 않고 너무 무심하지도 않게, 그냥 덤덤하게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 같은 그런 마음이 담겨 있어서 장만옥의 울 것 같은 얼굴보다 더 기억에 남는다.


4.

이 맥도날드를 같이 갔던 친구들은 지금 뭐하고 있을까. (위챗에서 방금까지도 낄낄대고 얘기했지만).

그냥 그 때 생각을 하면 '나만 이렇게 그리운가' 하는 서운함도 들고, 나만 계속 과거를 돌아보는 것 같아서 이젠 그만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5.
영화를 처음 본 건 고등학교 입학하면서  중국어를 처음 시작할 때였다. 그때는 이 영화에 캔토니즈가 섞여있고, 장만옥이나 여명이 하는 중국어 발음이 내가 나중에 배울 보통화랑은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도 몰랐다. 정말 '중알못'인 상태였지만 등려군이 대만사람이라 위에량다이비야오워'디'신이라고 배운 건 지금도 기억난다.

다시 보니까 그래도 쫌 짬이 찼다고 중국어 대사가 들린다. 캔토도 뭐라고 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드문드문 단어가 툭 귀에 박힐 때마다 그동안 주워들은 게 공으로 날아가진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도 들고.


6.
사람과의 관계가 인연인건지, 아니면 나 혼자 인연이라고 생각하고 꾸역꾸역 붙잡고 있는건지 요즘은 잘 모르겠다.

인생은 타이밍, 인연은 때, 호우는 지시절하는데, 이 관계는 도대체 어떻게 될까.


7.
첨밀밀이랑 비슷한 한국 영화는 호우시절이 최고다. 돌아오고 나서 두 영화를 같이 보면서 피천득 수필집 엄청 읽었는데.

지금도 비슷한 걸 보니 주어진 인연보다는 내 의지가 좀 더 강한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