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I Daniel Blake>는 느낌표, 궁서체 영화다. 켄 로치 앞에 당연한 수식어가 '좌파'인만큼 형식보다는 그 메시지가 중요하다.
영화는 아무런 인트로 음악없이 까만 화면에 나레이션만 나와서 NHS와 전화하는 다니엘 블레이크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National Health Service는 우리나라의 의료보험이랑 비슷한데 이 번호가 있어야 학교도 갈 수 있고 일도 할 수 있다. 병원에 가려고 해도 이 번호가 있어야 해서 이 번호가 있어야만 영국에서 시민의 권리를 누릴 수 있다.
상담원과 통화하다 "그 대답은 이미 52쪽에서 했는데"라고 하는 말을 듣자마자 영국에 처음 도착해서 빼곡한 서류를 채우던 생각이 나서 숨이 막혔다.
당신은 전문가냐고 묻는 다니엘의 말에 "우리는 아웃소싱한 전문가입니다"라고 하는데 영국에서 전화하던 생각이 났다. 대부분은 인디언이나 파키스타니들이 콜센터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이 사람들의 영어도 제대로 된 게 아니라 뭔가 설명하려면 전화기를 잡고 몇 시간을 싸웠던 기억이다.
2.
다니엘 블레이크의 주치의는 소견상 휴직을 권한다. 하지만 NHS의 스탠다드에 따르면 다니엘 블레이크는 일을 해야만 하는 '노동자'다. 일괄적인 평가기준은 개인의 문제를 제대로 짚어내지 못한다. 시스템은 최대한의 효용성을 추구하지만 그 사이에 발생하는 간극은 결국 온전히 개인이 짊어져야 할 피해가 된다.
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하지만 일을 하면 심장에 무리가 와서 살 수 없는 이런 역설적인 상황에서도 다니엘 블레이크는 푸드 뱅크를 거부했다. 그는 시민이고 곧 일할 것이라고 믿는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3.
케이티는 말투부터 다르다. Jordy 사이에서 확연히 구별되는 말투에서 외지인이라는 게 드러난다. 실제로 이 배우는 런던 출신이고 CHELSEA 팬이다 ktbffh!!
싱글맘에다 런던의 렌트를 감당못해 노숙자 하우스 생활을 전전하다 겨우 집을 마련했다. 다시 학교에 돌아가 꿈을 찾고 싶지만 사는 건 쉽지 않다. 새로 찾은 집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고, 냉골에 음식조차 넉넉하지 않아 푸드뱅크에서 베이크드 빈을 허겁지겁 퍼먹는다. 그렇지만 자신을 돕는 다니엘에게 토마토 파스타 한 접시를 양보할 수 있는 '시민'이다.
음식은 구할 수 있지만, 여자에게 필요한 용품을 살 수는 없다. 사치재라고 할 수 없는 생리대, 데오도란트, 면도기 (영국에서 제모와 데오도란트를 안하면 미개인취급받는다)를 훔치다 잡혔다. 이것도 극사실이라고 느낀게 테스코나 세인즈버리가 아니라 그냥 동네 슈퍼마켓이었다. 정말 저소득층 동네에는 체인 샵이 잘 들어오지 않는다.
결국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지만, 그곳에서 다니엘 블레이크가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었다.
4.
다니엘 블레이크는 자신도 힘들지만 그보다 어려운 사람을 도왔다. 마지막 남긴 편지에서 그는 "나는 개도 아니고 구걸하지도 않았다. 나는 인간답게 살 권리를 요구한다"고 했다.
영국뿐만이 아니라 전세계가 각자도생의 시대다. 신자유주의는 그 이름처럼 新하지 않은 시스템이 돼버렸다. 사람들은 국가 시스템보다 개인의 능력에 의존해 생존한다.
켄 로치 영화는 몇 편을 빼놓고는 너무 주장만 가득한 것 같아서 반감도 들었다. 그럴 거면 다큐를 찍고 프로파간다를 만들고 운동을 해라. (사실 대부분 주장만 남은 영화에 갖는 생각도 이것) 그런데 이 영화에서만큼은 간절히 호소하는 것 같다. 지금 복지가 과연 사람을 돕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Humiliating 한 다음에 나락으로 밀어넣는 복지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영화에서 말한다.
펜션 수급자를 보는 시선은 크게 두 가지다. 잠시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내 돈을 좀먹는 게으름뱅이. 신자유주의는 후자를 없애고 사회를 더 빠릿하게 움직여보자는 발상에서 시작됐다.
물론 맞는 말이다. 영국에서 살 때 가장 견딜 수 없던 건 수급자들의 무기력함이었다. 안해도 죽지 않을 정도로 살 수는 있으니까 하지 않겠다던 그 사람들의 게으름과 늘어진 모습을 보면서 이 사회에서는 못살겠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그런데 모든 펜션 수급자를 다 '세금도둑'이라고 하는 순간 다니엘 블레이크같은 이들이 나타나게 된다.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 순간마저도 '게으름'으로 치부하고 왜 일하지 않냐고 몰아세우는 순간 개인의 존엄성은 사라진다. 도움이 필요한 이를 몰아세울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도와준다고 이것을 '베푼다고' 생각한다면 결국 그 누구도 돕지 못한다.
5.
영화를 보면서 영국 살던 때 생각도 나고 요즘 상황이랑도 겹치는 게 많아서 엉엉 울었다. 아마 올해 본 영화중에서 제일 많이 운 영화같다.
나는 연대라는 말을 싫어한다. 정치적 스탠스고 뭐고를 떠나서 우리나라에서는 연대가 이상하게 왜곡돼서 '대의'를 위해 개인을 억누르는 기제가 된 것 같아 '연대', '우리'라는 말을 들으면 거부반응이 먼저 든다.
<I Daniel Blake>는 느낌표, 궁서체 영화다. 켄 로치 앞에 당연한 수식어가 '좌파'인만큼 형식보다는 그 메시지가 중요하다.
영화는 아무런 인트로 음악없이 까만 화면에 나레이션만 나와서 NHS와 전화하는 다니엘 블레이크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National Health Service는 우리나라의 의료보험이랑 비슷한데 이 번호가 있어야 학교도 갈 수 있고 일도 할 수 있다. 병원에 가려고 해도 이 번호가 있어야 해서 이 번호가 있어야만 영국에서 시민의 권리를 누릴 수 있다.
상담원과 통화하다 "그 대답은 이미 52쪽에서 했는데"라고 하는 말을 듣자마자 영국에 처음 도착해서 빼곡한 서류를 채우던 생각이 나서 숨이 막혔다.
당신은 전문가냐고 묻는 다니엘의 말에 "우리는 아웃소싱한 전문가입니다"라고 하는데 영국에서 전화하던 생각이 났다. 대부분은 인디언이나 파키스타니들이 콜센터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이 사람들의 영어도 제대로 된 게 아니라 뭔가 설명하려면 전화기를 잡고 몇 시간을 싸웠던 기억이다.
2.
다니엘 블레이크의 주치의는 소견상 휴직을 권한다. 하지만 NHS의 스탠다드에 따르면 다니엘 블레이크는 일을 해야만 하는 '노동자'다. 일괄적인 평가기준은 개인의 문제를 제대로 짚어내지 못한다. 시스템은 최대한의 효용성을 추구하지만 그 사이에 발생하는 간극은 결국 온전히 개인이 짊어져야 할 피해가 된다.
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하지만 일을 하면 심장에 무리가 와서 살 수 없는 이런 역설적인 상황에서도 다니엘 블레이크는 푸드 뱅크를 거부했다. 그는 시민이고 곧 일할 것이라고 믿는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3.
케이티는 말투부터 다르다. Jordy 사이에서 확연히 구별되는 말투에서 외지인이라는 게 드러난다. 실제로 이 배우는 런던 출신이고 CHELSEA 팬이다 ktbffh!!
싱글맘에다 런던의 렌트를 감당못해 노숙자 하우스 생활을 전전하다 겨우 집을 마련했다. 다시 학교에 돌아가 꿈을 찾고 싶지만 사는 건 쉽지 않다. 새로 찾은 집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고, 냉골에 음식조차 넉넉하지 않아 푸드뱅크에서 베이크드 빈을 허겁지겁 퍼먹는다. 그렇지만 자신을 돕는 다니엘에게 토마토 파스타 한 접시를 양보할 수 있는 '시민'이다.
음식은 구할 수 있지만, 여자에게 필요한 용품을 살 수는 없다. 사치재라고 할 수 없는 생리대, 데오도란트, 면도기 (영국에서 제모와 데오도란트를 안하면 미개인취급받는다)를 훔치다 잡혔다. 이것도 극사실이라고 느낀게 테스코나 세인즈버리가 아니라 그냥 동네 슈퍼마켓이었다. 정말 저소득층 동네에는 체인 샵이 잘 들어오지 않는다.
결국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지만, 그곳에서 다니엘 블레이크가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었다.
4.
다니엘 블레이크는 자신도 힘들지만 그보다 어려운 사람을 도왔다. 마지막 남긴 편지에서 그는 "나는 개도 아니고 구걸하지도 않았다. 나는 인간답게 살 권리를 요구한다"고 했다.
영국뿐만이 아니라 전세계가 각자도생의 시대다. 신자유주의는 그 이름처럼 新하지 않은 시스템이 돼버렸다. 사람들은 국가 시스템보다 개인의 능력에 의존해 생존한다.
켄 로치 영화는 몇 편을 빼놓고는 너무 주장만 가득한 것 같아서 반감도 들었다. 그럴 거면 다큐를 찍고 프로파간다를 만들고 운동을 해라. (사실 대부분 주장만 남은 영화에 갖는 생각도 이것) 그런데 이 영화에서만큼은 간절히 호소하는 것 같다. 지금 복지가 과연 사람을 돕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Humiliating 한 다음에 나락으로 밀어넣는 복지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영화에서 말한다.
펜션 수급자를 보는 시선은 크게 두 가지다. 잠시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내 돈을 좀먹는 게으름뱅이. 신자유주의는 후자를 없애고 사회를 더 빠릿하게 움직여보자는 발상에서 시작됐다.
물론 맞는 말이다. 영국에서 살 때 가장 견딜 수 없던 건 수급자들의 무기력함이었다. 안해도 죽지 않을 정도로 살 수는 있으니까 하지 않겠다던 그 사람들의 게으름과 늘어진 모습을 보면서 이 사회에서는 못살겠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그런데 모든 펜션 수급자를 다 '세금도둑'이라고 하는 순간 다니엘 블레이크같은 이들이 나타나게 된다.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 순간마저도 '게으름'으로 치부하고 왜 일하지 않냐고 몰아세우는 순간 개인의 존엄성은 사라진다. 도움이 필요한 이를 몰아세울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도와준다고 이것을 '베푼다고' 생각한다면 결국 그 누구도 돕지 못한다.
5.
영화를 보면서 영국 살던 때 생각도 나고 요즘 상황이랑도 겹치는 게 많아서 엉엉 울었다. 아마 올해 본 영화중에서 제일 많이 운 영화같다.
나는 연대라는 말을 싫어한다. 정치적 스탠스고 뭐고를 떠나서 우리나라에서는 연대가 이상하게 왜곡돼서 '대의'를 위해 개인을 억누르는 기제가 된 것 같아 '연대', '우리'라는 말을 들으면 거부반응이 먼저 든다.
하지만 기본적인 삶마저 보장되지 않는 사회라면 과연 혼자만의 힘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내 삶의 기본적 권리를 이 국가 시스템이 해줄 수 있을까.
생각이 많아지고 멍해졌다. 영국에서 느꼈던 막연함을 수십년 살아온 내 나라에서 느끼게 될 줄이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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