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December 21, 2016

2016 내맘대로 어워드

작년에 이어 올해도 쭉 정리해본다. 남은 열흘간은 이제 아무 특별한 일 안만들고 술만 마시고 놀 계획.



소설 - 거짓말이다 (김탁환), 댓글부대 (장강명)
이 두 사건의 배경이 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나는 한국에 없었다. 그래서 항상 전해 듣고 간접적으로만 화를 냈다. 책을 읽으면서 사건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생각도 들고,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졌다.

사회과학- 빨래하는 페미니즘 (스테파니 스털)
올 한 해 가장 큰 수확이 있었다면 페미니즘에 대해 좀 공부한 거? 주디스 버틀러는 아직 이해할 짬이 안되는데 이 책은 그냥 생활형으로 술술 넘겨 읽었다. 물론 글쓴 사람이 백인이고, 인종이슈에 대해서는 또 다른 비판이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현실적'인 고민을 학술적으로 정리해놓은 걸 보고 나니까 내 생각도 정리가 되는 느낌.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늦게 배운 하루키가 무섭다.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게으르지 않기가 힘들다. 여기서 게을러지면 나는 한량이고 백수고 건달이 되겠지만, 이 책 (추가로 장강명씨 페이스북) 보고 규칙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려고 노력한 것 같다.

(+) 위험한 도덕주의자 (기타노 다케시), 정의에 대하여 (애덤 스미스)

영화

BOB -I, Daniel Blake 
I demand- 영국생활하면서 내가 느꼈던 무기력함을 고스란히 영화에서 느낄 수 있었다. 켄 로치가 이렇게까지 간절하게 영화에서 얘기한 적이 없었는데, 토리 장기집권이 확정되면서 사회에 대해 엄청나게 긴장한 모습이 보인다.

상반기- 탐정 홍길동
잘생긴 남자, 화려한 촬영, 쉬운 스토리. 이거면 됐지 뭘 더 바라...

하반기 -걷기왕
귀여움이 모든 걸 이긴다. 노력 결핍과 과잉에 대해 생각해볼만한 영화.

(+) 재개봉 - 굿윌헌팅, 키즈 리턴
(++) 극장판 - 코미디의 왕, 질투 (필립 가렐)

-

스페인 말라가 피카소 미술관
만나던 여자 사진을 쭉 전시해놓은 걸 보고 '한 번 살거면 이렇게 살다 죽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과 부러움이 든 공간. 바르셀로나 미술관은 파리에 비해서 특색은 떨어지고 말라가처럼 개인의 느낌이 잘 안나온 것 같아서 그냥 그랬다. 니스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도 가보고 싶다.

퐁피두 센터 파울 클레 전시회
매표소 마감 시간이 지나서 못들어갈 뻔 했는데,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했더니 살짝 들여보내줘서 겨우 본 전시. 못갔으면 파리에 체류할 생각까지 했어서 그런지 더 기쁘게 본 전시. 유머러스하고 단순한 선, 그 속에서 느껴지는 복잡한 감정들.

발레
해본 운동 중에서 제일 재밌다. 마음과 몸과의 괴리감은 어쩔 수 없지만, '잘하고 싶다'는 욕망이 든 운동은 처음이다.

뎃생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는 마음만 있었는데 다시 시작하니까 아 그림을 보는 걸 더 좋아하는 구나 하고 알게 됐다. 선택 실패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내 취향에 대해 이해하는 시간.

쉑쉑버거 - 쉑스택
이거 먹으려고 MCR-LDN 왕복한 거 생각하면 아련하다. 고기에 치즈, 버섯까지 들어갔다니 맛없을 수가 없다. 비싼 것도 모르겠다. 맛있으면 그만. 언제 또 가지?

통영 가족여행
오랜만에 가족들이랑 보낸 시간. 제일 가깝지만 제일 어려운 가족과 부딪히지 않는 법을 배워가는 중.

브렉시트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랍지 않다. 내 월급은 사라지고 세상에 대한 기대감도 사라지고 있다. 타임머신이 생겨서 올해 5월의 나에게 '브렉시트 통과돼고 트럼프는 대통령돼고 시카고 컵스는 우승한대' 이런다면 과연 나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첼시
무리뉴 감독이 돌아왔지만 그는 북쪽으로 떠났고, 콘테가 왔을 때 솔직히 음? 했다. 세리에를 많이 안봐서 믿음도 없었는데. 요즘 첼ㅅ1보는 맛에 산다. 코스타가 이렇게 변할 줄이야.
앞에서처럼 올해 5월 나한테 '브렉시트 통과돼고 트럼프는 대통령되고 시카고 컵스는 우승한대.'까지는 그냥 넘어갔겠지만 '콘테와서 코스타 인성개조함'이라고 했다면 '미친x아, 그만해라' 라고 멱살잡았을지도. 내년 5월이 기대된다.

니트
2015년에 가장 골치였던 피부 알러지가 '좋아졌다.' (알러지엔 완치가 없다.) 두 달 동안 밀가루와 술과 고기를 끊으면서 약을 먹은 덕인지, 1년간 빠지지 않고 헬스장을 두드린 덕인지, 아니면 올해 내가 마음이 좀 편해져서인지 몸이 간지러워 잠못자는 일이 줄었다. 덕분에 올해는 니트를 마음놓고 입고 있다. 더이상 면직, 면 100%의 희쭈그레한 옷을 안입어도 된다. 아직 앙고라나 너무 fluffy한 (적확한 한국어를 못찾겠다) 니트나 퍼는 못입지만 그래도 이정도 입을 수 있다는 게 다행이다. 통장이 탈탈 털리도록 예쁜 니트를 더 사야지.

인간관계
올 한해 최고 수확. 중요하고 좋은 거니까 특별히 제일 좋아하는 초록색으로 쓰는 중. 
혼자 있는 것도 별로 안좋아하지만 어울리는 건 더 못하는 편인데 올해 많이 나아진 것 같다. 혼자 있는 시간을 줄이려고 학교다닐 때보다 신촌에 더 꾸준히 나갔고, 이런저런 모임도 많이 만들었다. 여러 사람 생각도 들어보려고 나름대로 애썼고 그 덕분에 예민한 성격이 좀 유해졌다. 한 해 더 거슬러 올라가 작년 5월의 나한테 '브렉시트 통과되고 트럼프 대통령되고 시카고 컵스 우승, 코스타는 갓스타된대'에 이어서 '이주현이 먼저 나서서 매일같이 약속을 잡는대'라고 했다면 "미친x아 그만해라"를 넘어 경찰서에 신고했을지도. 그만큼 놀랍다. 1년만에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걸까? 나도 앞으로 내가 어떻게 변할지 신기하고 기대된다. 

2017년이 빨리 와도 좋고 아니어도 그만일 것 같다. 이정도면 꽤 괜찮은건가? 2017년에는 ( 한국사는 청년으로서 대한민국 성장률과 발맞춰) 올해보다 딱 2.5%만 더 자란 내가 돼 있기를. 

Monday, December 12, 2016

나, 다니엘 블레이크 (I, Daniel Blake, 2016)

1.
<I Daniel Blake>는 느낌표, 궁서체 영화다. 켄 로치 앞에 당연한 수식어가 '좌파'인만큼 형식보다는 그 메시지가 중요하다.

영화는 아무런 인트로 음악없이 까만 화면에 나레이션만 나와서 NHS와 전화하는 다니엘 블레이크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National Health Service는 우리나라의 의료보험이랑 비슷한데 이 번호가 있어야 학교도 갈 수 있고 일도 할 수 있다. 병원에 가려고 해도 이 번호가 있어야 해서 이 번호가 있어야만 영국에서 시민의 권리를 누릴 수 있다.

상담원과 통화하다 "그 대답은 이미 52쪽에서 했는데"라고 하는 말을 듣자마자 영국에 처음 도착해서 빼곡한 서류를 채우던 생각이 나서 숨이 막혔다.

당신은 전문가냐고 묻는 다니엘의 말에 "우리는 아웃소싱한 전문가입니다"라고 하는데 영국에서 전화하던 생각이 났다. 대부분은 인디언이나 파키스타니들이 콜센터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이 사람들의 영어도 제대로 된 게 아니라 뭔가 설명하려면 전화기를 잡고 몇 시간을 싸웠던 기억이다.


2.
다니엘 블레이크의 주치의는 소견상 휴직을 권한다. 하지만 NHS의 스탠다드에 따르면 다니엘 블레이크는 일을 해야만 하는 '노동자'다. 일괄적인 평가기준은 개인의 문제를 제대로 짚어내지 못한다. 시스템은 최대한의 효용성을 추구하지만 그 사이에 발생하는 간극은 결국 온전히 개인이 짊어져야 할 피해가 된다.

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하지만 일을 하면 심장에 무리가 와서 살 수 없는 이런 역설적인 상황에서도 다니엘 블레이크는 푸드 뱅크를 거부했다. 그는 시민이고 곧 일할 것이라고 믿는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3.
케이티는 말투부터 다르다. Jordy 사이에서 확연히 구별되는 말투에서 외지인이라는 게 드러난다. 실제로 이 배우는 런던 출신이고 CHELSEA 팬이다 ktbffh!!

싱글맘에다 런던의 렌트를 감당못해 노숙자 하우스 생활을 전전하다 겨우 집을 마련했다. 다시 학교에 돌아가 꿈을 찾고 싶지만 사는 건 쉽지 않다. 새로 찾은 집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고, 냉골에 음식조차 넉넉하지 않아 푸드뱅크에서 베이크드 빈을 허겁지겁 퍼먹는다. 그렇지만 자신을 돕는 다니엘에게 토마토 파스타 한 접시를 양보할 수 있는 '시민'이다.

음식은 구할 수 있지만, 여자에게 필요한 용품을 살 수는 없다. 사치재라고 할 수 없는 생리대, 데오도란트, 면도기 (영국에서 제모와 데오도란트를 안하면 미개인취급받는다)를 훔치다 잡혔다. 이것도 극사실이라고 느낀게 테스코나 세인즈버리가 아니라 그냥 동네 슈퍼마켓이었다. 정말 저소득층 동네에는 체인 샵이 잘 들어오지 않는다.

결국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지만, 그곳에서 다니엘 블레이크가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었다.

4.
다니엘 블레이크는 자신도 힘들지만 그보다 어려운 사람을 도왔다. 마지막 남긴 편지에서 그는 "나는 개도 아니고 구걸하지도 않았다. 나는 인간답게 살 권리를 요구한다"고 했다.

영국뿐만이 아니라 전세계가 각자도생의 시대다. 신자유주의는 그 이름처럼 新하지 않은 시스템이 돼버렸다. 사람들은 국가 시스템보다 개인의 능력에 의존해 생존한다.

켄 로치 영화는 몇 편을 빼놓고는 너무 주장만 가득한 것 같아서 반감도 들었다. 그럴 거면 다큐를 찍고 프로파간다를 만들고 운동을 해라. (사실 대부분 주장만 남은 영화에 갖는 생각도 이것) 그런데 이 영화에서만큼은 간절히 호소하는 것 같다. 지금 복지가 과연 사람을 돕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Humiliating 한 다음에 나락으로 밀어넣는 복지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영화에서 말한다.

펜션 수급자를 보는 시선은 크게 두 가지다. 잠시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내 돈을 좀먹는 게으름뱅이. 신자유주의는 후자를 없애고 사회를 더 빠릿하게 움직여보자는 발상에서 시작됐다.

물론 맞는 말이다. 영국에서 살 때 가장 견딜 수 없던 건 수급자들의 무기력함이었다. 안해도 죽지 않을 정도로 살 수는 있으니까 하지 않겠다던 그 사람들의 게으름과 늘어진 모습을 보면서 이 사회에서는 못살겠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그런데 모든 펜션 수급자를 다 '세금도둑'이라고 하는 순간 다니엘 블레이크같은 이들이 나타나게 된다.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 순간마저도 '게으름'으로 치부하고 왜 일하지 않냐고 몰아세우는 순간 개인의 존엄성은 사라진다. 도움이 필요한 이를 몰아세울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도와준다고 이것을 '베푼다고' 생각한다면 결국 그 누구도 돕지 못한다.


5.
영화를 보면서 영국 살던 때 생각도 나고 요즘 상황이랑도 겹치는 게 많아서 엉엉 울었다. 아마 올해 본 영화중에서 제일 많이 운 영화같다.

나는 연대라는 말을 싫어한다. 정치적 스탠스고 뭐고를 떠나서 우리나라에서는 연대가 이상하게 왜곡돼서 '대의'를 위해 개인을 억누르는 기제가 된 것 같아 '연대', '우리'라는 말을 들으면 거부반응이 먼저 든다.

하지만 기본적인 삶마저 보장되지 않는 사회라면 과연 혼자만의 힘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내 삶의 기본적 권리를 이 국가 시스템이 해줄 수 있을까.

생각이 많아지고 멍해졌다. 영국에서 느꼈던 막연함을 수십년 살아온 내 나라에서 느끼게 될 줄이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