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등학교 저학년때, 그러니까 아직 만화책을 읽지 않았을 때다.(나름 교사 자녀라 만화책은 엄마랑 학교 따로 다니던 5학년부터 읽기 시작했다.)
주말의 상처럼 엄마는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비디오 한 편을 빌려주셨다. 청구 아파트 비디오 가게 아저씨랑 친해져서 비디오가게에 들어오는 카달로그+일요일 아침에 영화프로그램에서 나오는 영화를 비교해가면서 도장 격파하듯 매주 영화를 봤다. 엄마꺼, 내꺼 해서 두 편씩 봤던 것 같다.
대개 15세까지는 보게 해줬는데, 이날 이 영화를 고른 엄마는 내 영화를 먼저 마치고 "넌 빨리 자"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좋아할 만한 배우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뭔가 흥미로워 보이는 영화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엄마나 아빠는 "영화는 별로"였다고 했다.
2.
그리고 대학와서 1학년 즈음인가? 다시 지적 허세에 빠져서 영화 DVD 도장격파를 하고 있을 때 이 영화를 봤다.
보다가 껐다. 그 때 나는 A 아니면 B, 그러니까 모 아니면 도, 1 아니면 0, 흑과 백, 그렇게 분명한 세계에서 살고 있어서 이런 'affair'가 왜 명작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가족은? 결국 다 속인 거잖아. 아니 그것보다 왜 남편도 있는 사람이 뭐가 좋다고 저런 깡마른 아저씨한테?
'내가 좋아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이럴 리 없어' 라는 생각에 원작 소설도 읽어봤지만 '불륜 미화' 그 이상 이하도 아닌데, 역시 쯧쯧, 예술은 moral-less 라면서 끝까지 못 봤다. (비슷한 느낌으로 대학교 때는 화양연화에서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
3.
오늘 영화를 보면서 내가 이렇게 잘 우는 사람이었나? 싶었다. 렌즈는 또 빠졌다. 일회용이라 다행이다.
몇 년 동안 또 몇 번 아프고, 좀 바닥도 치고 나서야 프란체스카가 왜 처음 만난 로버트에게 끌릴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됐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꿈을 물어봐 주길 원하고, 그 꿈을 인정받고 싶어한다. 그런데 가족, 함께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이 가장 기본적인 욕구에는 무관심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 공기처럼 기본 값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묻지 않았고 알아채려 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The old dreams were good dreams; they didn't work out, but glad I had them"
이라면서 처음으로 꿈을 말하는 낯선 사람이 말을 건다.
우주의 먼지 마냥 하찮은 존재처럼 느껴지는 자신에게 "you are anything but a simple woman"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그 사람에게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4.
역시 그 빌어먹을 꿈이 문제다.
내가 좋아했던 건 그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내 꿈을 대신 봐준' 그 사람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