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November 29, 2016

키즈 리턴 (Kids Return, 1996)

1.
청춘 영화를 좋아하지는 않게 됐다. 나이도 먹을만큼 먹었고, 이제 '힘내자'라는 말에 더이상 위안받을 만큼 힘이 넘치지도 않는다.

그냥 다 접고 나갈까, 아니면 다 때려칠까 하는 생각만 하다보니 한 달이 끝났다. 역시나 11월은 힘든 달이 맞고, 나는 정말 우주의 먼지만큼도 못한 존재가 된 것 같았다. 한동안은 잠이 안와서 고민이었는데 요즘은 눈이 안떠져서 힘들다. (사실 힘들지는 않는데 이 상황과 내 모습이 짜증난다.)

이 상황에서 청춘 영화를 본들 뭐가 달라질까, 그래도 기타노 다케시 영화를 스크린으로 볼 수 있으니까, 하는 마음으로 별 기대없이 또 극장에 갔다.


2.
영화는 전체적으로 파란 톤이다. 대개 청춘영화들이 여름을 배경으로 하고 빛나는 햇살, 그리고 초록 톤의 화면인데 반해서 이 영화는 파랗다.

푸르고 젊은 색들 중에서 초록색은 생명을 담고 있지만 파란색은 그렇지 못하다. 영어에서 Blue가 우울함을 상징하기도 하는 것처럼 이 영화 속 청춘은 우울하기만 하다. 어느 한 놈도 청춘의 '열정', '패기' 이런 건 없다. 베베 꼬이거나 남이 하는 대로 따라가거나, 아니면 남의 말에 홀린다. 자기 자신이 없다.

자기 아래로 봤던 신지가 복싱에서 재주를 보이자 마사오는 엇나간다. 내가 하자고 한 건데 나는 재주가 쥐뿔 없는 상황에서 마사오는 열등감에 빠진다. 신지는 야쿠자까지 돼버리고 마는 마사오가 낯설다. 하지만 복싱에 욕심이 있어서 시작한 건 아니라 옆의 선배 하야시의 뀀에 빠져 술담배에 약물까지 손대며 스스로의 재능을 망친다. 이 둘처럼 극단적으로 나가지는 않아도 히로시도 마찬가지로 자기 주장이 없다. 좋아하는 여자한테 직접 고백도 우물쭈물, 회사에 입사해서도 결국 옆자리 동료의 말만 듣고 퇴사하고 택시 운전을 한다. 그런데 또 거기서도 회사의 압박때문에 야간 운전을 하다가 사고가 나버린다.



다른 청춘영화들이 음악을 하거나 여행을 하거나 격렬하게 사랑을 하거나 뭐 이런 과잉된 에너지가 넘친다면 이 영화는 항상 100의 상황에서 90에서 멈춰버리는 청춘의 이야기다.


3.
영화의 마지막 장면 대사가 제일 유명하다. 결국 복싱도 관두고 야쿠자에서 내쫓긴 둘은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 옛날처럼 자전거를 탄다. 그리고 묻는다.

"Do you think we are already finished?"
"Hell no, we haven't even started."
(영어 대사로 외운 이유는 내가 이 영화를 처음 본 게 불법 영어자막이어서 그렇다.)

아직 이 둘은 시작도 안했다. 이게 희망적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생각이 조금 다르다. 항상 90에서 끝내버리고 실패하고도 "나는 노력을 덜했으니까 손해본 건 없어" 하면서 자기위안을 삼는다.

이때도 그렇다. 뭔가 열심히 살지 않았던 것을 위한하면서 "아직 내가 시작한 게 아니니까" 하면서 나의 실패를 위로하는 거다.

이렇게까지 비비꼬아가며 영화를 볼 필요는 없었는데, 요즘 내 상황이 짜증나는 일로 가득차다보니 이렇게 보인다. 영화가 원래 그런거 아닌가. 좋을때는 좋게, 나쁠때는 한없이 나쁘게. 같은 영화라도 내가 만약에 조금 더 에너지가 넘친 상황이었다면 "오 역시, 다시 시작하자" 하며 감동의 도가니에 빠졌을 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럴 힘이 단 1퍼센트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다.

기타노 다케시도 이 둘은 시작도 안했지만, 다시 실패할 확률은 70퍼센트라고 나중에 인터뷰에서 말한 적 있다. 열린 결말인 것 같지만 이미 닫힌 결말인 게 인생이다.




4.
영화와 별개의 사족.
이날 영화는 아트나인에서 기타노 다케시 특별전 상영회로 상영했다. 아트나인에서는 항상 맨 뒷줄에 앉는데, 이날 내 라인의 맨 끝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지브이 하는 이해영 감독이었다. 옆자리가 비었길래 "어 그러면 여기는 변영주 감독?" 하는 내심의 계산을 하면서 '감독 옆에서 영화를 보다니' 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데 앞으로 이 두 분이 하는 지브이는 안 갈 것 같다.

청춘영화니까 만능비기인 "아프니까 청춘이죠" 라는 식의 대답과 "감독님의 청춘은 어땠습니까"하는 질문들. 무슨 힐링캠프나 토크콘서트에서 볼 법한 질문들이 영화 지브이, 그것도 감독 특별전에서 너무나 당당하게 나온다.

나는 이것보다 왜 이런 영화에서 이런 앵글이 쓰인 것 같고, 음악에 대해서도 더 얘기하고 싶었고 (음악감독이 히사이시 조다), 또 이런 '청춘 영화'를 뻔하지 않게, 다르게 보는 법같은 여튼 영화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는데 청춘영화라는 이유로 뭔가 '나는 이렇게 힘드니까 위로해주세요'하는 성토의 장이 된 것 같았다. 감정 과잉은 질색이고, 나를 설명하려는 가엾은 청춘 이야기는 질린다.


5.
11월이 끝나야 이 삐딱함에서 벗어나려나.
정말 계절도 힘들고 지금 상황은 더럽게 힘들다. 영화보는 데 이 주인공의 핑계들이 지금 내 모습 보는 것 같아서 보고 있는데 화가 치밀어서 뛰쳐나가고 싶었다.